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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1242

예수와 만난 사람들 이렇게좋은 책도 있을까 싶으네요. 저 따분한 성경책이, 읽어도 읽어도 마른 껍질을 씹듯이 재미없는 책이 이렇게도 흥미진진한 책이 될 수 있다니. 딱딱하게 마른 나무 껍질을 깎아내면 거기 향긋한 물기가 있기 마련 아닙니까? 그런데 그 물기는 거꾸로 거꾸로 스며 올라가는 물기거든요. 거꾸로 올라가서 잎을 싱싱하게 돋혀 내고 고운 꽃을 피우고 사랑처럼 노래처럼 살구, 앵두, 자두를 열게 하는 물기거든요. 나는 일흔이 다 되도록 성경을 꽤나 많이 읽었고 성경에 관한 책도 많이 읽은 셈인데, 이렇게 성경의 숨은 뜻을 따뜻한 숨결로 숨쉬게 해주는 책은 일찍이 읽어본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써보고 싶다고 마음으로 생각하던 글을 나보다 훨씬 더 예민한 감성으로 잡아, 나보다 훨씬 더 흐르듯 날카로운 필치로 써내.. 2004. 12. 6.
내 안에 주님을 모실 구유를 만든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실 구유를 만든다. 제대 주위에 꾸며진 대림환에 네 개의 촛불이 모두 빛을 밝혔다. 이는 구원자 메시아의 거룩한 탄생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성탄을 기다리며 기뻐하는 마음은 나이 어린 꼬마들에서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내용과 양상은 다를지라도 그 근본은 같을 것이다. 거리를 나서면 벌써부터 성탄 분위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교회에 뿐 아니라 호텔, 상가, 식당들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오색 반짝이는 전등으로 꾸며져 즐비하게 놓이고 또 걸려있음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성탄 카드와 선물을 벌써부터 주고받으면서 성탄을 축하하고, 소망이 성취되기를 기원한다. 어떻게 보면 성탄의 진정의 의미를 모르는 비신자들이 오히려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성탄을 기다리고 또 지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2004. 12. 5.
폭탄선언: 죄인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든다. 폭탄선언: 죄인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든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내세운 예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은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예수님의 반문(反問)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의 반문에 그들은 겉으로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속내는 요한도 예수도 믿지 않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이 불신(不信)을 더욱 명확히 하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고, 이 비유를 통하여 불신이 가져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백성의 지도자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자체는 알아듣기 쉽게 짜여져 있으나, 비유의 적용에 다소 모순점이 보인다.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비유의 적용에서 각각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 2004. 12. 4.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제2이사야서(40-55장)가 달리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책이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40,1) 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예루살렘의 기쁨을 미리 내다본다.(40,9) 유배기간은 그들에게 복역기간이었고, 죄벌을 받는 기간이었으며, ‘잃어버린 기간’이었다. 이제 그 기간이 끝난다.(40,2) 예언자는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40,3-4) 목자가 양떼에게 풀을 뜯기고,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며,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 2004. 12. 1.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대림시기 1주간 월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복음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하지만 딱히 어떤 선택의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만 선택된 부분이 장(章)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독된다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중 제10주간부터 34주간 사이에 봉독된 적이 없는 대목을 택한 경우가 많다. 굳이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내용을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병자와 소경치유, 죄사함 등의 기적과 억눌린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위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서 믿.. 2004. 11. 30.
너희가 곧 성전이다. 너희가 곧 성전이다.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상혼(商魂)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 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當日)로 보도하고 있다.. 2004. 11. 27.
성 안드레아 사도 : 단 한 사람을 낚는 낚시꾼 성 안드레아 사도 : 단 한 사람을 낚는 낚시꾼 11월의 마지막 날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한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서 형과 같은 어부였으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시던 예수로부터 형과 함께 제자로 불림을 받았다. 안드레아는 베싸이다 출신(요한 1,14), 아니면 가파르나움 출신(마르 1,29)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처음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그 첫 번째 사람이다.(요한 1,35-40) 그리고는 자기 형을 예수께 인도하였다.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안드레아는 복음서에 16번, 사도행전에 1번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승천, 성령강림 사건에 함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성령강림 이후 안드레아는 흑해 연안의 소아시아 전역과 오늘날 불가리아.. 2004. 11. 26.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제2주간을 맞이하면서 대림환의 두 번째 촛불을 밝혔다. 대림 제1주일의 말씀주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겨냥한 것으로서 세상구원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예고와 그에 대한 준비의 태도로써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경고였다.(마태 24,37-44) 오늘 대림 제2주일의 말씀주제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직접적인 약속으로서 이사야의 예언(40,3-5)이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가 선포하는 회개의 세례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대림시기가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긴장, 단식과 고행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막연한 기다림’이기보다는 메시.. 2004. 11. 25.
오늘의 거울 속에 내일이 보인다. 오늘의 거울 속에 내일이 보인다. 매일 거의 비슷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이 전혀 다른 하루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어제의 결과요, 내일은 오늘의 투영(投影)이다.”고 말한다. 내일이 오늘의 투영이라는 말은 ‘오늘이 내일을 미리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① 하나는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계획하여 추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D-Day’를 정하거나, 정해진 ‘D-Day’에 맞추어 준비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다’는 단언(斷言)은 유효하다. 시험을 치루기 위해 시험날짜에 맞추어 공부.. 2004. 11. 25.
일상(日常) 속에서의 최후 일상(日常) 속에서의 최후 예루살렘 성전이 무참히 파괴되고, 도성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며,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이스라엘의 운명(기원후 70년 8월 29일)은 곧 세상의 종말로 확대해석 된다. 예수께서 세상 종말의 시기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피하셨지만, 그 때 나타날 징조들을 말씀하셨다.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과 민족들 간의 전쟁, 반란과 지진, 기근과 전염병, 천체에 일어날 대변화가 그런 징조들이다. 그런데 이런 징조들이 있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 있다. 오늘 복음은 세상종말의 징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들을 전해준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박해와 고발, 체포구금과 재판, 항변과 증언, 그리고 고문과 죽음이다. 이는 예수의 제자라면 누구나,.. 2004. 11. 24.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가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 2004. 11. 23.
헌금의 가치는 마음이 결정한다. 헌금의 가치는 마음이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전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에 관한 토론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고(20,27-40),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경계하라(20,45-47)고 가르치신 예수께서 그곳을 나오셔서 성전밖에 설치된 헌금 궤를 보고 계셨다. 예루살렘 성전 밖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명목의 헌금 궤가 13개나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넉넉함에서 얼마씩을 헌금하였지만, 어떤 가난한 과부는 작은 동전 두 닢을 헌금하였다. 그 두 닢이 곧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액수로 따지자면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과부의 헌금이 컸다고 하셨다. 가진 것을 몽땅 바쳐버린 과부는 앞으.. 2004.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