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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대림 제3주일 - 세례자 요한의 기쁨

by Oh.mogilalia 2015. 12. 13.


루카 3,10-18 (세례자 요한)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3,18). 세례자 요한은 근본적으로 기쁨을 선포하였습니다. 비록 소유의 기쁨을 애써 멀리하고 최소한의 거칠고 성긴 의식주, 곧 낙타 털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하며 광야에 몸을 맡기고(마태 3,4), 마귀가 들렸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의 철저한 금욕생활을 함으로써(7,33), 뭇사람들의 눈에는 기쁨과는 무관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을지라도 말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향해 ‘모두 잘 살고 있으니, 지금처럼 맘껏 즐기라.’고 달콤한 말을 건네기보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3,3),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했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자신이 기쁨을 누렸기에 기쁨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기쁨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유의 기쁨, 풍요의 기쁨, 욕구 충족의 기쁨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쁨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4)는 이사야서를 인용한 자기 신원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기쁨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 그리고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이 바로 요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3,16)는 확신에 찬 겸손한 고백에도 담겨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독려합니다. 기쁨의 원천이신 주님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서, 짧은 인생에서 순간적인 쾌락을 쫓는 죄를 주저함 없이 끊어버리고 다그칩니다. 이에 호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청합니다. 이들을 적당히 다독여 유명세를 누릴만한데, 오히려 이들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3,7-8).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지지자들을 순식간에 적대자로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발언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고서는, 곧 적당히 옛 생활을 즐기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새 생활에 몸담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3,10). 이 물음에서 오래전 주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 미카 예언자에??던진 물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미카 6,6-7). 당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미카 6,8).

세례자 요한 역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응답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의로움(정의)으로 더불어 함께 살기만을 요구하신다고 대답합니다.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가톨릭교회교리서 1807항)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이는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에 따른 정의를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명쾌합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상화되는 오늘날 더욱 그렇습니다. 끝없는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존재’보다 ‘소유’를 삶의 가치로 삼는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바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는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가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재화의 보편 목적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사목헌장, 69항). “모든 선한 것의 기원은 땅과 인간을 창조하

시고, 인간에게 땅을 주시어 자신의 노동으로 땅을 지배하고 그 열매를 따 먹도록 하신(창세 1,28-29 참조) 하느님의 행위 자체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차별과 편애 없이 땅을 주시어 그 모든 구성원들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다. 이것이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바탕이다”(백주년 31항).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떠올려야 합니다.

다시 오늘의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정의의 요구는 세리와 군사들에게 이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온 세리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이는 곧 정의를 실천하라는 요구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교도 권력에 부정직하게 협력하는 자들이기에 특별히 중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세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모든 착취를 삼가고, 정의를 실천하며, 당국이 세금으로 책정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리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 더 많이 징수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업무를 정의에 입각해 행함으로써 그와 같이 돈 버는 것을 그만둘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군사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정의에 입각해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신을 찾는 군중들에게 정의를 외쳤던 세례자 요한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를 실천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3,16). 요한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자신을 위해 취하지 않음으로써 정의를 드러냅니다. 요한은 자신을 메시아로 추앙하려는 백성들의 기대감에 힘입어 개인적인 명성을 추구함으로써 얻게 될 헛된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뒷자리에서 주님을 미리 준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참된 기쁨을 누립니다. 이제 요한의 기쁨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쁨을 떠올리며, 제 자리를 찾음으로써 겸손과 정의를 실천했던 세례자 요한에 대해 묵상하며 썼던 글을 마지막으로 벗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뒷자리>


언제나 함께 계시는 주님,

언제나 당신의 뒷자리에 서게 해 주소서.

벗들에게 보내는

나의 작은 웃음이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는

자그마한 표지가 되게 하소서.

내 입으로 전해지는

편안한 한 마디의 말이

당신께서 우리 안에서 속삭이는

감미로운 음성이 되게 하소서.

힘든 이의 어깨를 감싸는

나의 따스한 손길이

모든 이를 품에 안는

당신의 포근함을 전하게 하소서.

나를 향한 모든 과분한 칭찬에 우쭐하지 않고

모든 감사와 찬미가

바로 당신의 것임을 깨닫고,

기쁘게 당신의 뒷자리에 서게 하소서.

나를 통해 당신이 더욱 선명하게 보여 지고,

나를 통해 당신이 더욱 큰 자리를 차지하실 때,

나는 당신의 사제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다는 것을

나의 자그마한 삶을 통해서 깨닫게 하소서.

언제나 나를 이끄시는 당신을 따라 가며

삶의 가장 아름다운 뒷자리에 자리하게 하소서.


<의정부교구 교하본당 상지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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