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그리고 때가 되면 연중행사처럼 치러 내야 할 판공성사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고해를 하는 신자나 받아주는 사제 모두가 어려워한다. 심리학자 C. G. 융은 ‘고해는 최고의 카운슬링’이라는 말까지 했지만 과연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제 역시 고해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한다.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는 교회와 친교를 회복하는 고백자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은 죄 때문에 손상을 입은 교회의 생명을 되살리는 효과도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고해성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한 용서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받으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고해의 의무’를 철저하게 관리해 왔다. 자신이 지은 죄를 사제를 통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이는 칠성사 중의 하나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 지게(가시화)하는 은총의 통로라 가르치고 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매년 한 번 “소속 본당 사제 앞에서” 혹은 그의 허락을 받아 다른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부활시기에 영성체를 해야 한다(제21조)는 규정을 발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시행되는 유효한 규정이다.
그러나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전의 고해는 원래 평생에 한 번만 하는 것이 인정된 공개적인 속죄행위였다. 교회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사회적인 제재가 따랐다. 그래서 고해를 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실제로 당시의 고해성사는 자신이 범한 죄가 주위에 알려져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경우에만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였다. 그로 인하여 이후에는 공개적인 방식이 아닌 사제와의 사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형식으로 고해 형식이 변경되기 시작하였다.
평생에 한 번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하는 고해를 1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니 고해의 내용이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성적인 금기들이 상당히 많았다.
여러 가지 성행위에 대한 금지규정. 가령 생리 중, 임신 중, 수유 중의 성행위가 금지되고, 성탄과 부활,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은 성행위가 안 된다는 규정까지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의 시간들과 일상의 행동까지 교회가 모두 지정하여 언급하게 되니 그런 류의 범죄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14세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보면 사제가 고해를 듣다가 흥분하여 그 여성을 겁탈했다는 이야기 등을 통해 반추해 볼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시대에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교회가 신자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생활까지 개입하고, 성을 단속하는 센터처럼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금기시하는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이 커다란 문제를 야기했고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발표한 “고해성사의 기원이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법에 기원이 있다”는 말에 대한 해석 여부는 신학자들의 몫이겠지만 트리엔트보다 300여 년 앞서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규정한 71개 항목 중에 놀랍게도 현재까지 유지되고 지속되는 것은 제 21항 고해성사에 대한 규정 하나뿐이다.
사실 당시의 규정 안에는 성직자들의 유혈결투 금지(18항)와 성당 참사들의 사생아들이 같은 성당의 참사가 되는 것을 금지(31항)하는 것뿐 아니라 제5차 십자군 파견(71항)과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의 규정은 지금까지 놀라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고해성사 규정은 교회가 신자들을 통제하기 용이한 수단으로 변모되기 시작하였다.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사제의 이야기들이나 고해의 은총에 대한 여러 가지 신비스런 이야기들은 이러한 개인 고해 규정을 보다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도구가 되었다.
신자들은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더욱 은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사제가 개인 개인의 은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통제나 조종을 용이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셀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이러한 교회의 권력침투 형태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통렬히 비판한다. “근대 사회의 고유한 특징은 사회가 성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구나 다 아는 비밀’로 이용함으로써 한없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데 열중한다는 것이다”
17세기를 성의 억압의 시대라 한다면 18세기 무렵부터는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추기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선동이 일어났다. 성이 통치의 문제로 부상한 것은 사회가 인구, 어린이들의 성, 교육 제도 등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인구’문제가 경제적, 정치적 문제로 등장하고 이는 권력 통치의 대상이 된다. ‘출산 장려’와 혹은 ‘산아 제한 조치’ 등으로 인구를 조종하고 통제 하는 데에 의학과 정신병리학은 큰 역할을 한다. 또한 형사법정에서의 욕망의 제한(간통과 강간 등의 문제)은 오히려 욕망의 포화, 성적 포화의 장치가 되어 버린다.
성과 쾌락에 대한 권력의 개입이 세분화 되어 증가하고, 주변의 성적 욕망을 격리하고 증대하고, 수다스러운 관심과 은밀한 쾌락을 공고히 하는 것은 더 넓은 성의 확산을 가져오게 하였다. ‘하지 말라’는 명제는 더욱 욕망하게 하는 성격이 있다. ‘코끼리를 생각 하지마’ 하는 순간 코끼리가 청자의 머릿속에서 뛰어 노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는 그 문이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개방의 구체적 징표 중 한 가지는, 성령께서 이끄시어 어떤 사람이 교회에 하느님을 찾으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문이 닫혀있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교회의 문이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은총의 촉진자라기보다는 은총의 결정권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돈을 걷는 톨게이트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있는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제 47항).
욕망이나 성적인 문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어야 할 성직자가 오히려 누구보다도 성(性)적인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는 구조에 놓이고, 더구나 비밀리에 다양한 성생활을 고백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오히려 이것이 성직자들에게는 커다란 유혹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이것은 더욱 성직자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성직중심주의의 뿌리에는 권력의 문제가 지적되지 않을 수 없는데 권력의 속성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보는 한 사람을 통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데이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한병철이 말한 투명사회의 피해자는 사실 권력에서 소외된 개인이나 집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투명을 요구하는 것은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요구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자기 아래의 검찰총장이나 권력에 협력하지 않는 이들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꼬투리를 잡아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 옹졸함이나 교구의 주교가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사제들의 투명성을 언급하며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러나 불투명한 것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나 장관들, 추기경이나 주교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투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마녀사냥터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비단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굴곡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현재의 고해성사는 신자들에게 적지 않게 부담이 되고, 그것은 오히려 주일미사를 빠지는 방식으로 도피하여 자신의 죄를 위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뿐이다. 이렇게 교회의 중요한 칠성사의 하나인 화해의 성사 고해성사가 신자들을 냉담한 교우로, 교회와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눈에 보이는 은총의 표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성사를 통해 은총을 부여하고, 죄를 용서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0항). 그러나 현재 교회의 고해성사는 어떠한 모습인가?
고해성사가 때로는 신앙생활에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신자에게는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마음의 부담' 혹은 '불편함'이 되어버렸다. 신자들은 자신이 ‘고해하러 왔다’는 그 자체를 사제들이 기꺼이 북돋아 주길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본인의 상황을 먼저 공감해 주고 이해한 뒤에 이를 보듬으면서 시작하는 성사를 가장 이상적이라고 신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 신자들은 ‘주일미사 불참죄’가 주를 이루고, 신부들은 사죄경을 동반한 십자성호를 그어주기에 바쁘다. 더군다나 판공 때는 사람에 밀려 말을 많이 하면 뒤에서 눈치를 준다.
“이렇게까지 하며 판공을 유지하는 것이 그래도 냉담자들을 줄이고 교회를 유지하는데 다행이다” 라고 말하며 위로하는 사제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떠나 현재 한국교회 신자들의 미사 참례율은 25% 미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왜 본당 사제들에게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고해할 내용이 있을 때 다른 본당이나, 수도회 신부를 찾아가 고해하게 되는 것일까? 또 고해성사는 이 시대에 어떻게 이해되고 운용되어져야 할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장 강우일 주교, 이하 주교회의)는 2014년 3월 춘계 정기총회를 통해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사목방안’(이하 공동사목방안)을 승인했다. 공동사목방안은 크게 주일 미사 참례 의무, 고해성사 의무, 고해성사 활성화를 위한 사목적 제안 등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으며,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주교회의는 ‘직업상 또는 신체적 환경적 이유로 주일미사에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참여하지 못하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묵주기도 5단, 그 주일미사의 독서와 복음 봉독, 희생과 봉사활동으로 주일미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밝혔다(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74조 4항).
그러나 주일미사 참례는 신자들이 행해야 할 최선의 의무이기에, ‘이 부득이한 경우’를 임의로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주교회의는 “성찬례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완전한 실현”이며, 성찬례 참석 없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음을 모든 신자가 확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판공성사를 받지 못해서 미사 참석을 어려워하는 신자들을 위해 “부활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 판공이나 1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받았다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지침을 밝혔다(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제90조 2항).
주교회의는 고해성사를 “무거운 의무”로 여기지 말고, “자유롭게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영적 유익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권했다. 또한 판공성사를 냉담교우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 온 한국교회의 관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고해성사의 본뜻을 덮어두고 고해성사를 형식화 시킬 위험이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아울러 주교회의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는 고해성사가 미사 전 짧은 시간에 집행되는 문제를 지적하며, 고해성사가 형식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주일미사 후나 특정한 날을 지정해 좀 더 여유롭게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면담식 고해성사를 원하는 신자들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지구와 대리구, 교구 차원에서 상설고해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제의 형식적인 훈화와 사죄경, 꾸짖거나 무안을 주는 사제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신학교 교육에서 상담의 기본적인 원리나 인간의 발달심리학 등에 대한 학습과 실습들이 있어야 할 텐데, 여타 과목의 중요성으로 실재적인 학문의 전수가 어려운 것이 현재의 사제양성 교육과정의 문제들이다.
사제들의 이런 태도는 신자들이 죄 사함과 하느님의 구원 은총을 체감하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고해성사에 대한 일반 신자들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의 학문적, 영적, 실천적 쇄신이 불가피 하다는 사실을 사목자들은 바라보아야 한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다. “해마다 고해성사를 받으라는 교회의 계명은 주관적으로도 자각한 중죄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구속력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미사의) 참회 예절이 성사적 성격을 띨 수 없다는 것은 교의가 아니다. 주일 계명을 마치 시나이 산에서 영원한 신적 계명으로 선포된 것인 양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