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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1239

소유(所有)와 위탁(委託)의 관계 소유(所有)와 위탁(委託)의 관계 오늘 복음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말씀들이 서로 모여 있다. 전체적인 이해를 돕는 데는 우선 어제 복음이었던 ‘부정직하지만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를 떠올려야 한다. 그 비유가 오늘 복음의 첫 부분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청지기의 편법적인 부정직함을 알면서도, 그러나 약삭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슬기로움을 칭찬한 부자주인의 입장을 은근히 동조하시면서,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청지기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실직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서 신속하게 자신의 미래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행동이 얄밉기도 하고 교활하기도 한 것이다... 2004. 11. 9.
나 하나가 곧 전부이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 전례력상 대림시기, 성탄시기, 연중시기(1), 사순시기, 부활시기, 연중시기(2)를 통틀어 평일미사의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이다. 그 중에서 연중시기를 살펴보면,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제9주간 토요일까지는 마르코복음(1,14-12,44)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34주간 토요일까지 루가복음(4,16-21,36)을 매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계속해서 루가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봉독하고 묵상하여 왔다. 그 중에서 연중 26주간 월요일까지의 복음(4,16-9,50)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한 보.. 2004. 11. 6.
아름다운 복수 오래 전 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던 유대인 부인을 만난 적이 있다. 독일에 대해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녀는 잔잔히 웃으며 "나는 복수에 대한 감정으로 내 인생을 파괴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 한홍의《거인들의 발자국》중에서 - * 가장 큰 복수는 용서라고 합니다. 한 순간의 복수를 위해 일생 동안 타인의 삶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한 순간의 용서로 응어리를 풀고 자기 삶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가라는 뜻일 겁니다. 기억하되 용서하는 것, 가장 아름다운 복수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이 바로 용서가 아닐까... '자신이 남을 용서해 .. 2004. 11. 4.
원수는 물에 새기고...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 2004. 11. 3.
동행(同行)의 의미와 추종(追從)의 의미 동행(同行)의 의미와 추종(追從)의 의미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가 14,1-24)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기쁨과 보람, 고통과 슬픔, 수고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2004. 11. 3.
하늘을 가진 손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반칠환의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중에서 - ==========성자들의 빈 손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요즘, 매주 유혹의 손길을 끊지 못하고 로또복권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절대 축복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움과 혹시나 하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힌다. 이제 젊어져야지 !!! 나도 2004. 11. 2.
삶과 죽음, 죽음과 삶 삶과 죽음, 죽음과 삶 오늘은 우리 가톨릭교회의 고유축일인 ‘위령의 날’로 지낸다. 교회는 전례력상 마지막 달이 되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한 달 동안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언젠가는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삶을 반성하여 회개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가능하면 11월 한 달 동안 자주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 친구, 지인(知人)들의 묘지를 찾아가 기도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은 정확히 1030년경 개혁수도회로 이름난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베네딕토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오딜로(Odilo, 962-1048)가 처.. 2004. 11. 2.
성인들의 후광(後光) 성인들의 후광(後光) 오늘은 전 세계의 교회가 오직 하느님의 영광 속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봉헌한 모든 성인(聖人)들의 축일을 기념한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강림하신 성령의 ‘공현’(公顯, Epiphania)이라고도 한다. 이는 성인들 자신이 하느님 성령 안에서 마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2,24) 이는 아직도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목적이기도 하며, 그 목적을 향한 우리의 여정 또한 계속된다. 성인(聖人)이 되었다 함은 그가 하늘나라에 입적하여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모든 성인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은 한해의 전례력 안에서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을 한꺼번.. 2004. 11. 1.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공관복음이 모두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치유사화(18,35-43)에 이어 루가는 오늘 단독으로 ‘예리고 출신 자캐오의 구원사화’를 전하고 있다. 예리고는 요르단강 서쪽,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 요르단강이 사해(-395m)에 합류하는 북서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250m 낮은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보면 예리고는 사마리아, 베레아, 이두매아 지방을 서로 이어주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유다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리고에는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많은 세관들이 있었고,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자캐오는 이들 세관들을 모든 관장하는 세관장으로서 돈.. 2004. 10. 31.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유교의 가르침이 몸에 베어있는 우리에게 예전까지만 해도 중용(中庸)사상은 미덕 중의 하나였다. 중용이란 매사를 처리할 적에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무과불급(無過不及)의 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중용을 희구(希求)하는 정신은 유가(儒家)에서 전인간적인 인격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수양의 최고수준을 상징하기도 했다. 중용의 덕은 끊임없는 자기감정의 절제와 섣부른 행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중용은 곧 극단 또는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방법이나 태도를 취하는 신중한 실행 및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끝 어느 쪽에도 편향(偏向)하지 않는 것이고,.. 2004. 10. 30.
안식일의 인격적 의미 안식일의 인격적 의미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이, 그것도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 식사에 초대했다는 이야기는 4복음서를 통틀어 루가복음에만 보도된다. 루가는 사실 세 번에 걸쳐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를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일을 보도하고 있다.(7,36; 11,37; 14,1)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이 베푸는 식사에 손님으로 가실 때마다 그 자리에 함께 초대받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다. 루가는 오늘 복음의 식사초대가 안식일에 일어난 일로 소개함으로써, 분명히 예수와 반대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를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1절) 아니나 다를까 그때 마침 수종(水腫)으로 온 몸이 부어 고통 받는 병자 한 사람.. 2004. 10. 29.
단죄와 구원의 기준은? 단죄와 구원의 기준은?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9,51)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정은 여행이긴 하지만 소풍도 아니고 관광여행도 아니다.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 출신의 제자들을 서울구경 시키려는 수학여행은 더욱 아니다. 멀지 않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고도 두 번씩이나 있었고(9,22-27; 9,44-45),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로 말미암아 우회로를 택해야 했던(9,56) 고충을 감안한다면 이 여행이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걸음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굳세기만 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심을 다시 한.. 2004.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