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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by Oh.mogilalia 2004. 11. 30.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대림시기 1주간 월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복음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하지만 딱히 어떤 선택의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만 선택된 부분이 장(章)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독된다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중 제10주간부터 34주간 사이에 봉독된 적이 없는 대목을 택한 경우가 많다. 굳이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내용을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병자와 소경치유, 죄사함 등의 기적과 억눌린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위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서 믿음과 불신을 대립시킴으로써 믿음이 하느님나라의 보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여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림시기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복음을 항상 독서에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봉독되는 독서가 거의 이사야예언서에서 발췌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사야예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집필된 세 권의 예언서가 한데 묶여 있다. 제1이사야(1-39장)는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자요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충실할 때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의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임마누엘이 되어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임마누엘이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2이사야(40-55장)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BC 587-538)를 배경으로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 해방과 자유를 제시한다. 특히 유명한 네 번의 “야훼의 종의 노래”를 통하여 야훼의 종이 바로 백성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사할 고난과 죽음을 불사하는 메시아임을 밝혀준다. 이 또한 신약의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된 모습이다. 제3이사야(56-66장)는 이스라엘이 귀양살이를 끝내고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됨을 예언하면서 이로써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선언한다. 이 또한 고난과 죽음을 불사한 신약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와 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서(이사 35,1-10)를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독서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어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말이 아니라 실재(實在)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른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환하게 트여, 그 길이 ‘거룩한 길’이라 불린다고 했다. 자, 이제 복음을 보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복음 안에 성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세상 안에 계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시는데 중풍병자 하나 고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거룩한 길’을 세우는 데 있다. 거룩한 길이란 곧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의 반대자들에게는 중풍병자가 단지 치유되어 ‘일어나 걸어가는 것’(24절)에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의 표징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믿음의 태도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비록 그 믿음이 주위의 도움을 받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육체의 병을 치유 받았음은 물론, 그 안에 죄사함을 통한 ‘정결하고 거룩한 길’을 닦고 그 길을 걸어가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