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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너희가 곧 성전이다.

by Oh.mogilalia 2004. 11. 27.

너희가 곧 성전이다.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상혼(商魂)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 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當日)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루가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원전(原典)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장도(長途)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일(當日),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가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성화(聖化)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하우스나 군대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고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