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선언: 죄인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든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내세운 예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은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예수님의 반문(反問)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의 반문에 그들은 겉으로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속내는 요한도 예수도 믿지 않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이 불신(不信)을 더욱 명확히 하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고, 이 비유를 통하여 불신이 가져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백성의 지도자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자체는 알아듣기 쉽게 짜여져 있으나, 비유의 적용에 다소 모순점이 보인다.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비유의 적용에서 각각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통상 큰아들이 상속권을 가진 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이를 대변하는 백성의 지도자급 사람들에 해당되고, 작은아들은 이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받고 더러는 실제로 죄인이었던 세리와 창녀들에 해당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따르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은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 하고, 작은아들은 가겠다고 말해놓고 나중에 가지 않았다고 하니,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바로 큰아들이다. 따라서 비유를 적용하는 과정을 보면, 큰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에, 작은아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만큼은 비유를 결과에 적용시키지 않는 편이 아예 낫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한국어 성서가 어떤 사본을 따라 번역되었는가 하는데 달려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번역은 시나이사본을 따랐기 때문이고, 바티칸사본에는 비유가 반대로 전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원본(原本)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서는 모두 사본(寫本)을 번역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으로는 1947년 2월 베두인의 한 소년에 의해 발견된 사해-두루마리(사해사본)로서 기원전 2세기경의 것이다. 그 외에도 신․구약 사본들은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하고 오래된 것으로는 기원후 400년경에 필사된 바티칸사본, 시나이사본, 알렉산드리아사본, 에프라임사본 등이 있다. 사본에 대한 번역본도 수없이 많으나 제일 오래된 것은 기원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70인역성서>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기원후 400년경 라틴어로 번역되어 정경(正經)으로 인정된 예로니모 성인의 <불가타역>, 1532년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역>, 1611년 영국 제임스 1세의 명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흠정역>(欽定譯, King James Version) 등이 있다.
우리의 번역본이 어떤 사본을 따랐든, 비유의 의미는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일하겠다는 말이나 다짐보다 실제로 일하였다는 행동이다. 직업상의 죄인으로 통하는 세리들과 윤리도덕상의 죄인으로 통하는 창녀들이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관리한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예수님의 발언은 가히 종교적인 폭탄선언에 가깝다. 겉으로 보기에 나름대로 질서 있는 당시의 종교적 가치관을 흔들어 뒤집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 말하지만 세례자 요한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세례자 요한 자체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올바른 길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곧 메시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죄인들이 하느님나라에 들어 갈 리는 없다. 그들은 단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하느님나라를 수용하였고, 그가 초대한 ‘회개의 세례’에 응답하여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 (1542-1591)
가난한 귀족가문 출신의 요한은 1542년 6월 24일 스페인의 살라망카 근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익히 안 요한은 어릴 적부터 수공기술을 배우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아버지를 여읜 후 가족은 메디나 델 캄포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 요한은 병원의 간호보조사로 열심히 일했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다. 1563년에 메디나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살라망카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요한은 1567년 사제로 서품된다. 요한은 자신이 속한 카르멜회의 느슨한 규칙에 만족하지 못해 엄격한 규칙의 수도회를 꿈꾸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1568년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를 만난 요한은 성녀를 도와 카르멜 개혁운동을 추진하면서 개혁수도회로 통하는 ‘맨발의 카르멜회’를 설립하였다. 물론 개혁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요한은 수많은 고통과 비난, 감금과 박해를 겪어야 했다. 실제로 1578년 종교재판소는 요한의 월권을 유죄로 판결하여 톨레도의 수도자감옥소에 감금하였다. 3달 동안의 처절한 감옥생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체험한다. 석 달 후 카발리오 수도회로 도망쳐 나온 요한은 자신의 개혁의지를 관철시킨다. 결국 개혁을 둘러싼 논쟁과 충돌은 ‘신발’과 ‘맨발’의 구별로 종결된다. 이렇게 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추구한 엄격한 규칙의 개혁수도회 ‘맨발의 카르멜회’가 설립된 것이다. 성 요한은 세고비아에 중앙본부를 둔 ‘맨발의 카르멜회’의 본부장이 되어서도 더 엄격한 규율을 위해 앞장선다. 결국 심한 병을 얻은 요한은 1591년 우베다 수도원에서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요한은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926년 비오 11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답게 십자가의 모순을 자신의 신비주의적인 삶으로 강조하였다. 십자가는 부활로, 고통은 황홀로, 어둠은 빛으로, 포기는 얻음으로, 자기부정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성인은 이러한 십자가의 지혜를 소재로 많은 신비적인 시(詩)와 서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카르멜 산에 오름》,《영혼의 어두운 밤》, 《사랑의 불꽃》, 《영적 찬미가》 등이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한의 저서들을 일컬어 “믿음을 가진 영혼들의 교과서요 학교”라고 했다. 성 요한은 참으로 십자가의 사람이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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