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제2주간을 맞이하면서 대림환의 두 번째 촛불을 밝혔다. 대림 제1주일의 말씀주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겨냥한 것으로서 세상구원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예고와 그에 대한 준비의 태도로써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경고였다.(마태 24,37-44) 오늘 대림 제2주일의 말씀주제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직접적인 약속으로서 이사야의 예언(40,3-5)이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가 선포하는 회개의 세례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대림시기가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긴장, 단식과 고행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막연한 기다림’이기보다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쁨과 희망으로 준비하는 ‘충실한 기다림’의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의 족보와 잉태, 탄생, 성장에 관한 이야기(1-2장)를 제외한다면 오늘 복음의 본문이 바로 마태오가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다.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복음의 시작이 세례자 요한의 출현으로 그 막을 올린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그 중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신다. 그러나 그 중심의 바닥에 세례자 요한이 서 있다. 즉, 구원역사의 시간상 흐름으로 따지자면 요한이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의 그 가운데 서 있다는 말이다. 요한이 곧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동시에 신약의 준비자 및 선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 안에서 구약의 모든 예언(豫言)이 성취됨을 보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의 핵심인 구원이 성취됨을 보게 된다.
요한세자가 알리는 그 시작이 오늘 복음에는 막연히 ‘그 무렵’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무렵은 통상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 했던 시기이다. 루가복음은 이 시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요한이 예고하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가 로마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 치세 15년, 즉 기원후 27~28년경임을 밝히고 있다. 루가의 정확한 시기에 비하여 마태오가 막연한 ‘그 무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각도에서의 해석이 있을 수 있겠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에 관한 정확한 시기의 언급이 이를 역사 안에서의 한 사건으로 만든다면, ‘그 무렵’이라는 표현은 역사 속의 어느 때든 마음먹는 때, 필요한 때, 그래서 오늘 복음이 성탄과 또 미구에 있을 재림을 준비하는 모든 이를 향한 복음이 되게 만든다.
세례자 요한이 출현하는 ‘그 무렵’은 결국 ‘광야’라는 장소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의 행차 길을 닦으러 오는 특사가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고 믿었다.(말라 3,1) 그런데 그가 궁궐이 아닌 광야에 나타날 줄이야 누가 짐작을 했겠는가? 광야에 사는 이가 입고 다니는 옷이나 먹는 음식은 광야라는 곳에서 조달된다. 바로 낙타털 옷과 가죽띠, 메뚜기와 들꿀이 그것이다. 요한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든 간에 그것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포의 메시지는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뿐 아니라 ‘독사의 족속 같은’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온다.(5-7절)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함이 요구된다.(8절)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유효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족보나 세례를 받았다는 증명서가 도래한 메시아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있는 보장이 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자 요한이 깨달았다. 요한은 아버지 즈가리야의 사회적, 종교적 지위와 영향력을 토대로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오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 그 증거로 요한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광야로 나아간 것이다. 광야는 늘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곳이며,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이다. 시끄럽고 혼탁한 세상, 매일같이 벌어지는 온갖 음주와 가무,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걱정들과 계산들로 둘러싸인 머릿속,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 광야와 같은 고요함을 내 안에 준비하지 않는 한, 메시아 탄생의 복음을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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