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와 누룩이 되어야
이 치유사건은 율법의 멍에를 지고 수백 년을 살아온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 구원의지의 암시적인 표현이다. 이는 곧 예수님의 강생으로 말미암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계시하시려는 하느님 나라는 신비(神秘) 그 자체이다.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고자 비유를 학습도구로 삼으신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의 소재는 겨자씨와 누룩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밭에 뿌려져 성장하면 그 어떤 나물종류의 푸성귀보다 크게 자란다. 최고 3m까지 자란다고 한다. 루가는 여기서 ‘큰 나무’가 된다고 했으나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늘의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려면 푸성귀가 나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국(終局)에 세상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 쇄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 있다.
누룩도 마찬가지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룩이지만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것들 같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능력은 필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낸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작디작은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장엄하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 임재(臨齋)의 표징으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또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아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지만 사도들의 복음선포가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제자단의 배반은 물론 선인과 죄인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 가운데는 열매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가 되면 추수의 기쁨도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들 안에는 하느님의 숨은 힘이 현존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긴 것을 행동으로 증언한다면 그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다. 그는 곧 큰 푸성귀(나무)가 되기 위해 밭에 뿌려진 겨자씨요, 빵이 되기 위해 반죽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룩이다.
그러나 여기에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겨자씨와 누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땅에 뿌려져야 하고,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이 저절로, 또는 자기 힘으로 땅과 반죽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 일만큼은 사람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겨자씨를 땅에 심고 누룩을 반죽 속에 넣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 나라 건설의 협력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고, 교회이며, 바로 우리들이요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박애주의로,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타(僞他)적 봉사정신으로, 교만을 겸손으로, 표면적이고 향락적인 관능을 내면적이고 영원한 순결로,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겨자씨로 땅에 묻혀 푸성귀가 되고, 누룩으로 세상의 반죽에 들어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발효시키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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