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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단죄와 구원의 기준은?

by Oh.mogilalia 2004. 10. 29.

단죄와 구원의 기준은?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9,51)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정은 여행이긴 하지만 소풍도 아니고 관광여행도 아니다.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 출신의 제자들을 서울구경 시키려는 수학여행은 더욱 아니다. 멀지 않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고도 두 번씩이나 있었고(9,22-27; 9,44-45),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로 말미암아 우회로를 택해야 했던(9,56) 고충을 감안한다면 이 여행이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걸음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굳세기만 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그 도중에 마치 어느 곳도 빼놓지 않으려는 의도로 여러 동네와 마을에 직접 들러 가르치셨다고 전한다.(22절) 세상의 심판과 구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루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종착역이 될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을 재차 강조하고,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적을 것이라는 걱정을 은근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숫자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에 ‘좁은 구원의 문’을 언급하셨다. 이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묻기보다, 묻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숫자보다는 좁은 구원의 문을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24절) 


여기서 노력한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개는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를 마지막 시간으로 미룬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발상(發想)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은 좁을뿐더러 문이 닫히고 나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이 한번 닫히면,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뇌물이나 억지는 물론, 끈덕진 요구도, 면식(面識)도, 친분(親分)도 통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심판에서 단죄와 구원을 판가름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악을 일삼는 자들’로 치부된다.(27절)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임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과 평소에 식사를 함께 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善)을 따라 행동했느냐 않았느냐는 것이다. 줄을 잘 선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善)과 정의(正義)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음의 조건이다. 구원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 소수만이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래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꼴찌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30절) 성조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잔치에 이미 들어 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허락 받았으나, 그들 자신은 정작 문 밖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문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당장 회개하는 사람이며, 회개의 표로 선(善)을 행하고 정의(正義)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