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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by Oh.mogilalia 2004. 10. 30.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유교의 가르침이 몸에 베어있는 우리에게 예전까지만 해도 중용(中庸)사상은 미덕 중의 하나였다. 중용이란 매사를 처리할 적에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무과불급(無過不及)의 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중용을 희구(希求)하는 정신은 유가(儒家)에서 전인간적인 인격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수양의 최고수준을 상징하기도 했다. 중용의 덕은 끊임없는 자기감정의 절제와 섣부른 행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중용은 곧 극단 또는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방법이나 태도를 취하는 신중한 실행 및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끝 어느 쪽에도 편향(偏向)하지 않는 것이고, 용(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일정불변함을 뜻한다. 


이러한 중용의 덕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다. 편을 만들어 갈라서고, 한번 갈라서면 지나치게 기울고 치우쳐 상대방을 근거 없이 반대하며, 한편만 보고 다른 한편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 애를 쓰고, 조금이라도 모자란다 싶으면 남의 것을 넘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우리들이다.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돌보고 굶어 죽어도 남을 것을 탐하지 않는 ‘동방예의지국’이 타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우선지국’이 되어 더불어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일등(금메달)이 아니면 안 되고, 최고와 일류가 돼야 한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며, 졸면 죽는다고 한다. 남을 딛고 이용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우리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우리들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말씀은 경종을 울린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의 처신에 관한 가르침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아 가 계셨다. 때는 안식일이었다. 예수님과 더불어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초대되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ㄷ\'자 모양의 식탁에서 서로 윗자리를 잡으려고 무언(無言)의 행각을 벌이는 동안, 예수님의 첫 시야(視野)에 들어온 것은 수종병자였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 돌려보내셨고 바리사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2-6절) 사람들의 눈에는 상좌(上座)가 우선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인간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그 다음 시야(視野)에 초대받은 자들의 위선(僞善)이 들어왔다.(7절) 


예수께서는 유교가 가르치는 중용의 미덕보다 우리의 관행을 뒤엎는 역설(逆說)의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관념상 가장 엄격한 예법이 요구되는 결혼식장의 비유를 들어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 상좌보다는 말석에 가 앉으라고 하신다. 이는 곧 겸손과 겸양을 말한다. 예수께서 얼마나 자주 겸손을 강조하셨는가? 회당에서 윗자리를 다투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윗자리를 다투는 제자들까지도 싸잡아 나무라시면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여질 것이라고 하셨다.(루가 9,46-48; 11,42) 구약성서에도 야훼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고 했다.(잠언 3,34; 18,12)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약이다. 라틴어의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노자(老子)도 겸손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한번도 높이 가려하지 않으며 그릇에 담으면 그릇 모양대로 자신을 베푼다고 했다. 


겸손과 겸양은 참으로 좋은 덕이다. 누구든 이 덕을 한번이라도 행한 사람은 그 놀라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겸손과 겸양은 사람을 결코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은 오히려 자유를 선물로 받는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이다. 겸손은 의기소침도 아니고 자의식에 대한 결핍도 아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에 대한 기쁨이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은 나보다 너를 먼저 찾고, 너보다 하느님을 먼저 찾는 사람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