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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다.

by Oh.mogilalia 2004. 11. 6.

나 하나가 곧 전부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 전례력상 대림시기, 성탄시기, 연중시기(1), 사순시기, 부활시기, 연중시기(2)를 통틀어 평일미사의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이다. 그 중에서 연중시기를 살펴보면,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제9주간 토요일까지는 마르코복음(1,14-12,44)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34주간 토요일까지 루가복음(4,16-21,36)을 매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계속해서 루가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봉독하고 묵상하여 왔다. 그 중에서 연중 26주간 월요일까지의 복음(4,16-9,50)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한 보도이고, 그 후부터는(9,5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도중의 활동에 관한 보도이다. 후자의 보도에서 우리가 받은 느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당부분 대단히 무겁다는 것이었다.(9,51-14,35) 갈릴래아 주변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 반대자들의 모함, 바리사이들의 누룩에 대한 경고,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재물에 대한 경고, 준비와 기다림, 회개와 속죄,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와 불행선언, 동행과 추종의 구별 및 엄한 예수추종의 조건 등이 바로 그랬다. 


오늘부터 봉독되는 루가복음 15장은 새로운 주제들로 전개된다. 루가복음사가의 고유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우선 예수님 말씀의 청자(聽者)로 세리와 죄인들이 거론된다.(1절)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 대한 비난의 빌미가 된다. 세리와 죄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당함과 어둠을 가까이 하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형상 죄인으로 낙인을 받았고 내적으로도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기에, 어쩌면 하느님과 종교에 관한 생각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편한 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에 비하여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고 종교 전문가들이며 직업적인 신심수행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형상 의인으로 자부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잃어버린’ 사람들과 ‘선택받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사실은 같은 이유에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걸음으로 예수께 다가왔으나 내심(內心)은 전혀 다르다. 윤리적 병자들과 같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들에게 의사(醫師)요 빛이다. 반면에 종교적 전문가요 의사(醫師)로 자처하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에게 비치는 빛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요 ‘돌팔이 의사’로 보이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기쁨의 큰 잔치를 베푸는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잔칫상이 꽉 차기를 바라신다.(루가 14,23)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있다. 100마리의 양 중에 99마리가 왔다 해도, 은전 10개중에 9개가 있다 해도, 그 잃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찾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실 뿐 아니라, 이참에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잃은 양 한 마리이며, 잃은 은전 하나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잃은 것에 속한다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외면하지 않고 회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100 중에 1개인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나 하나 때문에 세상 끝까지 찾아 나서시고, 찾을 때까지 하늘나라의 잔치를 미루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나 하나의 회개를 하느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그렇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 하나가 하느님께는 곧 전부(全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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