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의 가치는 마음이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전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에 관한 토론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고(20,27-40),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경계하라(20,45-47)고 가르치신 예수께서 그곳을 나오셔서 성전밖에 설치된 헌금 궤를 보고 계셨다. 예루살렘 성전 밖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명목의 헌금 궤가 13개나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넉넉함에서 얼마씩을 헌금하였지만, 어떤 가난한 과부는 작은 동전 두 닢을 헌금하였다. 그 두 닢이 곧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액수로 따지자면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과부의 헌금이 컸다고 하셨다.
가진 것을 몽땅 바쳐버린 과부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우리의 머리를 스친다. 실제로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오늘 과부의 헌금이 어떤 헌금보다 큰 헌금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부헌금의 사실유무를 떠나서 헌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헌금이나 헌물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치는 사람의 마음자세이다. 헌금의 액수에 관계없이 헌금에는 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마음은 제각기 다르다. 헌금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으니, 달갑지 않고 억지로 내는 마음, 자기의 위신이나 남의 이목 때문에 내는 마음, 넉넉하면서도 인색한 마음,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려는 마음, 마음조차 담지 않고 그냥 내는 마음 등이 그런 것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고 헌금이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친다면 정성껏 바쳐야 하고,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 바쳐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차마 바칠 수 없기에 우리는 생명을 대신할만한 것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바친다면 그것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도 바울로는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하느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지고의 존재인 하느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것을 버려야 하며, 또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한계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런 포기와 감수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엄청난 일이 실제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더욱 가난하게 되셨으며, 죽으심으로써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참다운 사랑이 그분 안에서 밝히 드러났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이토록 크신 사랑이 드러났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부자들의 ‘가벼운’ 헌금보다는 과부의 ‘온전한’ 헌금 속에 그 모습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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