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復活)은 소생(甦生)과 다르다.
예수님의 그리 길지 않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복음에 아주 드물게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부활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항자로서 잘 알려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록된 율법, 즉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여 모세율법의 자구(字句)를 고집하였으므로,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는 구전(口傳)의 법(法)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의적(敎義的)으로는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및 천사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마르 12,18; 루가 20,17; 사도 23,18), 오직 부유한 평안만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사제(司祭)들을 포함한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이 이에 속하였고(사도 4,1; 5,17), 로마인의 지배까지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환영하였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격한 증오를 표시하여 예수를 단죄하고 처형,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실로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예수를 곤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의 아내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 하는 수혼법(嫂婚法)이다.(신명 25,5-10; 창세 38,8) 그러나 사두가이파들의 맹점은 내세(來世)를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한 데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復活)을 소생(甦生)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죽은 후에 맞이할 새 세상이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우리의 상상 밖이다. 내세란 현세의 모든 생명질서가 무너지고, 죽음 자체가 완전히 극복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세의 부활은 이승의 차원이나, 죽었다가 소행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세의 질서, 철저한 시간과 공간, 즉 물리(物理)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우리가 부활의 차원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로 나누어져 있으나 하느님에게는 오직 현재의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를 일컬어 ‘순수현재’(純粹現在, pura praesentia)라고 한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과거가 있는 것이고, 끝이 있다면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요, 하느님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출애 3,6)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즉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오직 산 사람만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사하시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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