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죽음과 삶
오늘은 우리 가톨릭교회의 고유축일인 ‘위령의 날’로 지낸다. 교회는 전례력상 마지막 달이 되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한 달 동안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언젠가는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삶을 반성하여 회개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가능하면 11월 한 달 동안 자주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 친구, 지인(知人)들의 묘지를 찾아가 기도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은 정확히 1030년경 개혁수도회로 이름난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베네딕토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오딜로(Odilo, 962-1048)가 처음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여 온 세계교회로 퍼졌다. 오딜로 대수도원장은 수사들에게 ‘비록 그들의 죽음이 너와 무관하다 하더라도 자주 불쌍한 영혼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오딜로 성인은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의 수호성인으로 통한다.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식물도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면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것은 분명한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다른 차원에서의 생명의 원리가 지속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를 증명해 주셨다. 진정한 삶은 어쩌면 죽은 뒤에 가능한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죽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지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아가는 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사건이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죽음이 곧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져오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죄(罪) 중에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天國)에 바로 들지 못하고 연옥(煉獄)이나 지옥(地獄)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도 ‘연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화(淨化) 상태에 있는 연옥영혼들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아직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연옥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기도에 힘입어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상에 이른다면, 그들이 천상교회에서 지상의 우리들을 위해 전구해 줄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이러한 기도는 현세에 사는 지상교회의 소중한 의무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특권이다.
지상의 교회에 속한 우리는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죽는 것이 이득이고 사는 것이 형벌이다.’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 죽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해서 그만 살고 죽자는 말은 아니다. 작금(昨今)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왜 자살(自殺)을 하는 것일까?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이란 현실의 자신(自身)을 죽이고 다른 자기(自己)로 살아보려는 한 방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사면초가(四面楚歌) 같은 현실의 삶을 죽이고 다른 삶을 원하는 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삶을 기피하면 다른 삶도 그를 기피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삶을 긍정하고 잘 사는 것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는 말처럼 하루하루를 뜻있고 보람되게 사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삶은 분명 커다란 무게이고 짐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삶의 모든 멍에를 지고 사셨던 예수님 때문에 힘과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8절) 아멘.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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