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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지금’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by Oh.mogilalia 2006. 11. 17.

‘지금’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를 예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구약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가 올 때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로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날이 요란하게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 계신데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만이 메시아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 그리고 ‘벌써’로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와 있음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22-35절) 그런데 재림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재림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은 온다. 단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를 굳이 알고 싶으면 그 날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날짜’를 먼저 정하고 난 뒤에 그 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이 방법이 인자의 재림에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날들을 결정하지만 재림의 시기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 인자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날에 관하여 ‘언제, 어디서’보다는 ‘어떤 모양으로’ 그 날이 들이닥치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창세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날들을 정하고 그 날들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집을 지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바로 그 날에 그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일상(日常) 중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노아와 소돔의 교훈은 일상 속에 최후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최후의 날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가는 날들 속에 그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 있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과 장소도 바로 지금과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 완성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철저하게 혼자 서게 된다.(34-35절) 구원과 저주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스스로가 져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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