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를 예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구약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가 올 때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로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날이 요란하게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 계신데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만이 메시아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 그리고 ‘벌써’로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와 있음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22-35절) 그런데 재림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재림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은 온다. 단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를 굳이 알고 싶으면 그 날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날짜’를 먼저 정하고 난 뒤에 그 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이 방법이 인자의 재림에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날들을 결정하지만 재림의 시기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 인자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날에 관하여 ‘언제, 어디서’보다는 ‘어떤 모양으로’ 그 날이 들이닥치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창세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날들을 정하고 그 날들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집을 지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바로 그 날에 그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일상(日常) 중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노아와 소돔의 교훈은 일상 속에 최후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최후의 날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가는 날들 속에 그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 있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과 장소도 바로 지금과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 완성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철저하게 혼자 서게 된다.(34-35절) 구원과 저주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스스로가 져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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