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주(客主)』는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서울신문』에 총 1465 회 연재된 김주영(金周榮)의 대하역사소설이다. 창작과비평사에서 1981 년부터 단행본이 출간되기 시작하여 1984년까지 총 9권이 간행되었으며, 1992 년에는 같은 출판사에서, 2003 년에는 문이당에서 개정판이 각각 출간되었다. 이후 2013 년 문학동네에서 10 권을 포함한 완간판이 출간되었다.
추후에 발간된 10권은 탈출한 천봉삼의 뒷이야기를 다루지만, 정한조를 비롯한 울진의 소금 상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천봉삼은 처자와 함께 삼남으로 내려가던 중 울진 인근 십이령 고개의 화적떼에게 납치되어 억지로 행동을 같이 하게 된다. 하지만 정한조, 곽개천 등을 중심으로 한 울진의 소금상들에 의해 화적들이 섬멸된 후, 천봉삼은 정한조 등과 협력하여 유민들을 모아 인근 생달 마을에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고 마을 한가운데 새로 객주를 연다.
10권
제3부 상도(商盜)
멀고먼 십이령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섶다리 아래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울물 소리가 그윽하고 오묘했다. 그래서 호음교라 부르기도 하는 빛내골(小光里 혹은 召造院)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행상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갑신년 2월 하순, 시절은 봄빛이라지만 아직은 여우도 눈물을 짜낼 만큼 맵고 짠 추위는 가실 줄 모른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벼랑을 정이나 자귀로 찍어 겨우 발 디딜 길을 낸 벼룻길(遷道) 역시 꽁꽁 얼어붙었고, 산기슭에 쌓인 눈도 녹지 않아 계곡을 가르는 여울물 소리 듣기는 이른 시절이었다. 눈밭 속으로 바라보이는 소나무둥치는 붓으로 찍어낸 듯 먹빛이었고, 방울나귀들이 벼룻길을 박차고 걸을 때마다, 눈의 무게로 휘어진 나뭇가지들에서 눈덩이들이 떨어져 벼랑 아래로 흩어졌다. 잎을 모두 떨궈 앙상한 활엽수 가지는 새벽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남쪽 산등성이에 남아 있는 잔설들을 바라보노라면, 흡사 은갈치떼가 산기슭을 따라 서 있는 소나무 가지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켜가며 헤엄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겨울철에는 산속에 떨어진 열매나 갈잎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산양떼가 협곡을 가로질러 계곡으로 내려와 눈 속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는데, 까마귀떼들은 눈 덮인 나뭇가지 사이를 요리조리 옮겨다니며 산양떼를 보고 지악스럽게 짖고 있었다.
일행은 밤마다 호랑이가 내려와 판자문을 긁는다는 빛내골 마방집에서 노루잠으로 눈을 붙이는 시늉만 하고 축시말(丑時末)에 일어나 채비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나귀들을 선머리에 세우고 발행한 지 한식경 남짓, 이마에 와닿을 듯 가파른 자드락길을 피가 짚신을 적시도록 걸음을 재촉하였다. 열서넛을 헤아리는 상단 일행들은 그래서 숨소리만 거칠 뿐 농을 건네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행은 신표를 지닌 부상들이 향도하고 있었지만, 짐바리를 장시까지 져다주고 삯전을 받는 차인꾼들도 섞여 있었다.
울진 해안에 흩어진 염전이나 흥부장에서 내륙의 현동 저잣거리를 거쳐 내성장시까지는 줄잡아 160여 리 상거에 내왕 행보에는 눅게 잡아도 8, 9일이 걸린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십이령 내왕길에는 관원들의 숙소인 원집도 여럿이었다. 일행의 숙소참이었던 그곳 빛내골 숫막거리는 십이령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속에 자리잡았다. 관원들이 묵는 원집이 있다지만, 일 년 열두 달에 도임하는 현령 일행이 한두 번 지나다닐 뿐 울적하리만큼 적막한 편이었고, 울진 포구 염전에서 현동과 내성장을 오가는 소금짐들과 고포 미역, 그리고 연안에서 거둔 염장품과 건어물 들이 열두 고개로 이름난 이 산협길을 분주하게 오갈 뿐이다. 십이령 고갯길 여기저기에는 샘수골, 시치재, 말래, 샛재, 저진터, 빛내골과 같은 숫막촌이 여럿이지만, 어느 숫막을 막론하고 해 질 녘에 찾아든 길손들에겐 끼니 값만 받을 뿐 봉놋방은 공짜로 내준다. 그래서 일행들 역시 숫막 울바자 곁에서 써늘하게 식은 새웅밥으로 겨우 허기만 모면하고 봉노에 끼어들어 노루잠으로 때운 것이었다.
외양은 잔망스러워 보잘것없었으나 걸음은 잽싼 네 필의 방울나귀 등에는 꽁꽁 묶어 잡도리한 시겟바리와 무명짐이 거북스럽도록 높이 실려 있다. 나귀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자지러지는 듯한 워낭 소리가 가파른 벼랑길 아래로 따뜻한 봄날 나비떼처럼 흩어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걸음을 재촉하고 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길은 예상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내장조차 얼려놓을 듯 사정없이 옥죄고 드는 된추위가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상단 일행은 나귀들과 더불어 쉴 참도 두지 않고 걷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몰아치는 삭풍 속으로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갈개치는 눈발이 귓불을 할퀴고 볼따구니를 때릴 때마다 깊고 깊은 오한이 오장육부를 타고 핏속까지 파고들어 뼈마디를 얼어붙게 한다. 고개를 쇄골 깊숙이 박고 시선을 내리깔고 발걸음을 옮겨놓지만,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서럽고 매서운 설한풍은 막을 길이 없다. 갈 길은 여명 속에 희뿌옇게 깔려 이수(里數)조차 짐작하기 어려운데, 감발 속에 감춘 발은 언제부턴가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그런데 맨 뒤를 따르는 나귀 등에는 작은 부담농 하나만 달랑 얹혀 있다. 자세히 보니 그 나귀는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절뚝거리고 있는 절음난 나귀였다. 등에 짐을 실은 채로 앞장 선 암놈 궁둥이에 올라타려 하다가 앞굽 하나를 돌덩이에 짓찧긴 모양인데, 아주 으스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트기 전에 서둘러 발행할 만큼 여정이 다급한데 나귀 한 마리가 굽통을 다쳐 일행 모두의 심기가 불편하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숨죽이고 부지런히 걷는다면, 성황사와 비석거리가 있는 샛재까지 산길 30여 리는 아침 선반머리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샛재 들머리에 들어서면 깊은 산속인데도 여름에는 자지러질 정도로 차갑고,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를 정도로 뜨거운 샘이 있어, 고갯길을 넘나드는 상단들이 부담을 풀고 요기를 하거나 유숙하고 떠나기도 하였다.
한 가닥으로 길게 늘어선 상단 일행이 치받이길 산코숭이를 돌아 막 내리받이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쪽지게에 어머나 싶을 정도로 많은 무명짐을 싣고도 발걸음이 성큼성큼 거칠 것이 없던 한 동무가 발행한 이후 처음으로 앞에서 나귀를 몰고 있는 동무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문을 열었다.
“여보게, 만기?”
분주하게 쏟아지는 나귀들의 워낭 소리 때문일까. 만기로 불렸던 황구의 동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초리만 휘두른다.
“여보게, 만기?”
허우대가 껑충한 다른 일행들에 비하면 아담한 체구를 가진 만기는 걸음은 멈추지 않고, 허리만 꾸벅하며 힐끗 뒤돌아보는데, 얼른 보아도 용모가 계집처럼 여리다.
“나귀들을 세우게.”
일행의 뒤를 따르던 행수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쪽지게를 벗어 세운 뒤 성큼성큼 행렬의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매우 우렁찼으나 허우대는 일행의 여러 부상들 중에서 뛰어나게 우람하지는 않았다. 일행 모두가 지게를 벗고 벼랑길로 나서며 묵직하게 짓눌렸던 어깨를 추스르고 있었다. 상단의 숫자가 열이 넘든 혹은 대여섯에 불과하든 잠시 쉴 적에는 쪽지게를 벗지 않고 바위나 나뭇등걸에 의지하여 선 채로 숨을 돌린 뒤 다시 길을 재촉한다. 그것이 행상들의 몸에 밴 풍속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모두 한결같이 지게를 벗고 물미장으로 버텨 고정시킨 뒤 숨을 돌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말은 없었으나 이심전심으로 이번의 쉴 참은 오래가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여섯 사람을 건너 앞으로 나선 행수는 먼저 절음나서 절뚝거리고 있는 나귀의 앞 무릎에 감아둔 감발을 풀었다. 그리고 상처를 꼼꼼하게 살폈다. 빛내골 숫막거리를 나설 적에 사람도 먹지 않았던 막걸리를 두 사발이나 먹이고 얼추 응급조처를 하였다. 그러나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상처는 더욱 부풀어올랐고 길을 재촉할수록 마냥 더디기만 하였다. 그곳 마방에 두고 올 수도 있었으나, 조급한 마음에 끌고 온 것이 되려 화근이었다. 그러나 떠나온 빛내골보다 다가올 샛재가 더 가까워진 지금에 이르러선 후회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빛내골을 떠나 행상꾼들의 밥자리인 저진터재 계곡을 지나고 자치골과 또다른 밥자리인 느삼밭을 지나고 장차 구억터와 샛재골을 앞두고 있으니, 한식경 못다 가서 월천댁이 기다리는 샛재 비석거리에 당도할 것이었다. 일행 열넷 중에서 행수는 접소(임소)의 도감인 정한조였고, 나머지는 그 수하 부상들과 담꾼들이었다. 행수인 정한조는 일행 중에서 나이도 많아 보였고, 허우대도 크지 않았으나, 딱 벌어진 상반신에 행동거지가 매우 민첩해 보였다. 목소리에 위엄이 실려 있어 얼른 보아도 녹록해 보이는 위인이 아닌 듯했다. 절음난 나귀를 살피던 그는 혀를 끌끌 차고는 풀었던 감발을 다시 단단하게 조여매면서 견마꾼이었던 만기에게 말했다.
[속보] 尹 전 대통령, 특검 2차 소환 출석…취재진 질문에 묵묵부답
“지방에 대학이 없어 서울가나”…‘서울대 10개’ 둘러싼 논쟁들[에듀톡]
“나귀에 실린 부담을 내리게.”
그때까지도 동이 트지 않은 꼭두새벽이었다. 산기슭에는 역시 겨우내 쌓인 눈이 녹지 않은 그대로였고,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도 살을 에이긴 한겨울이나 다름없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눈보라가 으스스 떨며 벼랑길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고래등같이 덩치 큰 무명짐이나 시겟짐을 지고 고갯길을 재촉한 터라, 일행들의 땀에 절은 누비 등거리에선 더운 김이 솟아오르고, 목덜미에는 땀이 시꺼먼 땟국과 함께 줄줄 흘러내렸다. 마침 등거리를 벗어 땀을 훔치던 만기가 절음난 나귀에 실려 있던 부담을 내리기 위해 북두끈을 풀고 있었다. 부상한 나귀가 길바닥에 눕기 전에 조치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부담을 내리긴 하였으나 만기는 엉거주춤 선 채로 행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일행 중에 더이상의 등짐을 감당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 벗은 나귀는 걷기에 훨씬 수월해지겠으나, 담꾼들은 접은 두 다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감내해야 할 판국이었다. 견마를 잡고 있던 만기조차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의 과부하였다. 행수 정한조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숨 돌리게들……”
분부가 떨어지기 바쁘게 일행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허리춤에 찔러두었던 곰방대를 뽑아들었다. 코를 풀어 나뭇등걸에 쓱 닦고 나서 곰방대에 시초를 꾹꾹 눌러 다져 넣고 부싯돌을 쳐서 마른 쑥에 불을 당겼다. 일행 중 누구에게선가 창자까지 토해낼 듯 지독하게 내쏟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행수는 나귀에 실렸던 부담을 무릎치기도 하지 않고 두 팔의 근력만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필 것도 없이 뒤에 있던 자신의 무명짐 위에 올려 싣고 단단히 잡도리하였다. 아니래도 한 길이나 되던 무명짐 위에 부담을 얹고 보니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게 누가 더 높은가 겨루기라도 하자는 것처럼 보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머지 동무들은 도감 정한조의 행동을 못 본 척하였다.
등짐을 정리한 다음 행수 역시 곰방대를 꺼내 한 대 달아 물었다. 그는 지금 막 동이 트려는 동쪽 하늘로 시선을 던지면서 견마 잡았던 만기에게 일렀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앞장설 테니 자네는 뒤따르게….”
“절음난 나귀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절뚝거리는 나귀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견마 잡는 대신 비교적 가벼운 등짐을 진 것이 거북했었던 만기가 공치사를 하였다.
“빛내골 마방에 있는 대장간에 맡기고 올걸 그랬습니다.”
“그 마방의 대장장이 심보가 실로 고얀 놈이 아니던가. 여간한 말에는 대꾸조차 않는 그 뻣뻣한 행동거지에 비위가 뒤틀려서 무리를 한 것이야…시절이 수상해서 빈부귀천이 어느덧 물레방아가 된 세상이라지만, 그놈 역시 말구종 주제에 구실아치들처럼 평소에 생트집은 왜 그렇게 많던가. 말도 못 하고 눈망울만 굴리는 짐승을 다루는데도 걸핏하면 매질이고 욕지거리를 퍼붓는 게 아닌가. 그런 몹쓸 위인에게 식솔이나 다름없는 짐승을 맡겨 두고 차마 돌아설 수가 없었네. 그게 이런 무리를 한 단초가 되었네.”
그렇게 말하자, 벼랑길에 쪼그리고 앉아 쇄골이 깊숙하게 파이도록 담배 연기를 들이켜고 있던 동무 하나가 벌떡 일어서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놈 풀무꾼은 어떻구요. 아직 황구의 나이인데도 버릇없이 가탈을 부리고 방자하게 행세하는 꼴을 볼 때마다 배알이 뒤틀립디다…엽전 한두 닢 길미를 바라고 매기 잔등같이 미끄러운 십이령길을 사흘이 멀다 하고 넘나드는 우리들에겐 숫막거리에서 마시는 한 주발 막걸리가 불편한 심기를 달래줄 뿐이지요.”
“풀무꾼을 험담하다가 난데없는 막걸리 타령인가. 벌써 속이 출출한 게군. 목이 콩가루 삼킨 듯 칼칼해도 길참을 먹으려면 샛재 주막에 당도해야 하네….”
“목젖이 타들어가는 것은 임자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
“물귀신처럼 나를 왜 끌고 드나?”
“하긴 빛내골 발행할 적에 나귀만 해장술을 마시지 않았나.”
“나귀들이 막걸리를 좋아하는 대신 물 마시기는 좋아하지 않으니, 우리와 동행하기는 소나 말보다 낫지. 게다가 소나 말보다 귀와 좆이 홍두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크고, 무거운 짐을 져도 참고 견디는 힘이 사람을 앞지를 정도이니 우리네 행상들과 동행하기는 딱일세.”
“행상들뿐만 아니고 행세한다는 선다님들도 나귀를 좋아하지 않나. 좆이 커서 좋아할까.”
“잘도 주워섬기는군. 저것들이 한결같이 고집 센 것은 잊어버렸나. 동고동락하려면, 다음부턴 막걸리부터 나눠 마셔야 하네.”
분위기가 거북해질 것을 걱정했던지 성품이 무던한 만기가 얼른 끼어들어 말머리를 돌렸다.
“하긴 성냥일 하는 위인들이 오죽 못났으면, 짐승을 상종하여 거드름을 피울까요. 부담을 내려주었으니 샛재까지는 그럭저럭 대겠지요.”
“자, 얼추 땀들 들였거든 또 발행일세. 이제 몇 행보 남지 않았네.”
그토록 큰 등짐을 진 행수 정한조가 앞장을 섰다. 샛재까지는 내리받이길보다 치받이길이 많은 데다가 단출하지 못한 등짐 때문에 길 줄이기가 손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고, 콧등을 스치는 바람은 차갑지만 한결 상쾌했다. 늘어지게 쉬었으니 발걸음도 가벼워진 터라, 일행들은 가벼운 농까지 주고받으며 또다시 구억터의 산협길로 접어들었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사계절을 언제나 똑같은 얼굴들과 어울려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으나, 나누는 농담과 대화는 언제나 새로웠다. 저잣거리에 당도하면 그곳에서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들과 마주치기 일쑤였고, 그곳에서 만나는 닳고 닳은 거간들이며 말감고며 장주릅들과 물화를 두고 입씨름하고 흥정하면서 듣고 본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다시 모여서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따끈따끈한 것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사이, 네 필의 나귀를 혼자서 몰고 있는 만기는 자꾸만 일행에서 뒤처지고 있었다.
절음난 나귀에게 회초리를 내리지 말라는 행수의 분부가 있었을 때, 십이령길에서 태어나 나이 먹어가는 눈치 빠른 나귀들이 먼저 알아채고, 그때부터 오뉴월 쇠불알 늘어지듯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선머리에서 걷는 행수 일행과 당나귀를 뒤따르는 만기는 먼발치로 멀어지게 되었다. 선머리의 행중들이 산코숭이를 돌아설 때는 뒤따르는 나귀들의 요령 소리가 귀를 모아야 할 정도로 먼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선머리의 일행은 자주 쉬면서 만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쪽지게를 내렸다가 다시 발행하는 사이에 겪어야 하는 구차스러움이 뼈에 사무치도록 고통스러워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뒤처진 만기를 배려하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https://naver.me/5u9BySuG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4>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그 소동이 벌어진 것은 일행이 구억터의 자드락길로 몰아치는 바람을 안고 숨차게 오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문득 기척을 느끼고, 지게를 진 채로 멈추어 선 것은 일행의
m.seoul.co.kr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5>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얼마 가지 않아서 만기가 두고 온 벼랑길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러나 잡도리해 두었다는 네 필의 당나귀는 만기가 버리고 온 장소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시겟짐을
m.seoul.co.kr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6>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행수는 불문곡직 사내를 들쳐 업었다. 부러진 한쪽 다리가 하반신 아래로 축 늘어졌다. 아래쪽 자드락길에서 무명짐과 시겟짐을 수습하고 있던 동무들은 시신이나 다름
m.seoul.co.kr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7>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두 사람이 사타구니가 쓰리도록 열불 나게 걸어 당도한 곳은 샛재 턱밑인 비석거리였다. 이름하여 선정비나 공덕비란 것들은 길손들의 내왕이 번다한 길목에 즐비하게
m.seoul.co.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