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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客主)’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업, 특산물을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유통하는 유통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보관업 및 물류업을 하던 장소이자 그런 행위를 하는 상인을 말한다. 시작은 신라시대부터인데, 고려말 공양왕이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한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는 도가, 접소, 도방이라고도 불렀고, 객주의 성격에 따라 물산객주, 해물객주, 젓갈객주 등으로 불렀다. 상도덕을 강하게 규율했는데 매점매석을 하거나, 강매를 하거나, 보따리 장사를 하는 여인네를 범하면 곤장을 치곤 했다. 보부상은 보자기 보(褓)자와 짊어진다는 부(負)자가 합쳐진 것으로, 신체가 건장하고, 지름길을 많이 알며, 기억력이 좋고 셈이 밝은 사람들이 종사했다. 정보 수집에도 능해 어떤 물건이 달리고 넘쳐나는지 파악해 물건을 공급했기 때문에 물가를 조절하는 일종의 중앙은행 같은 역할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강력한 조직력을 정치권력이 가만히 놔뒀을 리 만무다. 흥선대원군은 보부청을 만들어 보부상 조직을 장악하려고 했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정부 편에서 토벌에 가담했다. 1898년 독립협회를 와해시킨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김주영의 『객주』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혼란한 개화기 상황에서 보부상의 생활풍속과 이들의 경제활동, 정치적 이해관계를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주인공 천봉삼을 중심으로 그려 내고 있다. 또한 송파 쇠살쭈 조성준, 들병이 출신 진령군 매월이, 백정의 딸로 어린 시절 청상이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천봉삼의 배필이 되는 월이, 금점꾼 출신으로 벼슬자리에 오른 이용익 등 실존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뒤섞여 지난 시절의 크고 작은 역사를 되살려낸다.
※ 참조 자료: 「김주영의 역사소설 『객주』 연구」, 박은정, 한국외국어대.
1. 주인공 천봉삼의 신분과 인식 변화
주인공인 천봉삼은 20대 중반의 사나이로 ‘천가객주’ 객주인이었던 아버지 천오수를 여덟 살 때 여위고, 누이 천소례에게 버림받아 천애고아가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보부상이 되어 홀로 ‘천가객주’를 다시 일으킨다. 아버지 천오수를 존경하던 쇠살쭈 조성준을 만나 돈이 무엇인지, 객주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깨우쳐 조선의 모든 돈과 상권을 움켜쥐고 있는 거상(巨商) 육의전 대행수 신석주에 맞서고, 돈의 노예가 되어 권모술수로 자신과 보부상들을 위협하는 길소개와 대적한다. 동패(동료)를 위해 목숨이 위태로운 일도 서슴지 않는 의리를 보여 주어 언제나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객주』는 천봉삼 중심의 서사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객주』에서는 천봉삼을 중심에 놓고 공간 설정에 따른 인물의 신분과 인식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제1부 외장(外場). 삼남지방에서 천봉삼은 보부상의 신분이다. 천봉삼은 조성준의 수하로 등장한다. 자신의 자금이나 채장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성준에 기대어 떠도는 것으로 묘사된다. 조성준과 헤어진 뒤에는 문경에서 매월에게 이끌려 안동으로 가고, 그 가운데 최선돌을 만나 그와 동사(同事)한다. 이 때도 천봉삼은 자신의 독자적 보부상 행위보다는 최선돌의 상거래를 돕는 역할에 머문다. 1부의 천봉삼은 ‘고향을 떠난 지 7년 동안 한 번도 고향 따을 밟아본 적 없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며 타관을 떠도는 뜨내기’로 독자적 활동을 할 자금조차 없는 하층의 보부상이다.
이런 보부상 인물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떠돌이 과정에서 목격하는 백성의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1부에서는 보부상의 주 활동 공간인 장터를 통해 백성이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민 생활의 모습을 살리기 위해 우리말 발굴에 힘썼다고 강조하는 작가의 노력은 1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장시에 울려 퍼지는 장사꾼들의 호객행위, 장사치와 각설이들의 타령과 사설은 서민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제2부 경상(京商). 서울에서의 천봉삼은 삼남지방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다른 사람의 뒤에 있거나 타인에게 기대는 인물이 아니다. 서울에서 세곡선의 통대선인으로 발탁되고, 수하들을 이끌기 위한 능력을 보여주는 자리에서는 힘과 의기를 가진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우선 왈짜들을 완력으로 제압시킨 후 연설을 통해 송패 왈짜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듣자 하니 여기 모인 우리 동패들 중에는 오직 기직자리 한 닢에 육신을 뉘며 동가식서가숙하는 홀애비가 태반이 넘고, 바자 두른 초옥에나마 가솔들을 거느리고 호구하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라고 들었다. 이는 본래부터 가계를 순리대로 이어갈 주변들이 못 되고 상슬(床蝨)【빈대】처럼 여염에 기대어 취탈한 재물이나 투전질로 얻은 재물이 허망함을 뜻하는 것이다. 누대 위에 앉은 자들이 그들의 직책을 빌미 삼아 결탁과 위계로 뇌물을 챙겨, 고래등 같은 저택에 호지 집이며 마름과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전곡과 포백(布帛)을 산처럼 쌓고 지낸다 한들 헐벗은 백성의 원성이 거기 있으니, 심기 편하기는 풍각쟁이보다 못하다. 또한 완력으로 취탈한 재물은 흐르는 물에 띄운 뜨물과 같아서 괴는 법이 없으니, 이는 차라리 손바닥에 담은 한 줌의 흙보다 못하다. 두 경우 모두가 백성의 포한이 뒤따랐으니, 일시의 호사는 알 수 없으나 사내로 태어난 명분과 기개를 걸기에는 너무나 졸렬하고 허망함이 많다. 한겨울 찬물 속에 발을 담그면, 생살을 저며내는 듯하고 단쇠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가권을 거두어 연명하는 방도에는 반드시 그런 고통이 뒤따르지 않으면, 창공을 날던 매가 오얏나무 가지에 걸린 것처럼 평생을 남의 입초에 올라 손가락질만 받고 살게 된다. (…)
“내게 생각이 없는 바가 아니다. 이번 삼남 뱃길 한 행보만 무사히 치르고 나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태가와 삯전이 수월찮을 것이다. 그것을 투전과 계집질로 날리지만 말고, 서로 추렴하여 동계(洞契)【동네의 일을 위해 동민이 모으는 계. 동리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을 송파 쇠전에서 굴리면, 장차 마방을 크게 짓고 인근의 농우소들을 사들일 수가 있다. 조금의 이문을 남기고 다락원이나 의주의 쇠전꾼들에게 소를 넘기면, 머지않아서 송파의 쇠전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장터가에서 진대를 붙이며 살아가던 행실을 정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제4권
천봉삼의 연설은 논리 정연할 뿐 아니라 적절한 비유까지 하고 있어, 달변가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왈패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습을 지적하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앞으로 살아갈 방도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한 계획이 서 있다. 이런 천봉삼의 변화는 앞으로 천봉삼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모습이 아니라, 지도자로 상인의 무리를 이끌어 감을 보여준다.
천봉삼은 세곡선에서 총대선인의 신분으로 활동하고, 세곡선에서 내린 후에는 송파의 상단 행수가 되지만, 세곡선의 경험은 이런 신분적 변화보다는 천봉삼의 인식에 큰 영향을 준다. 삼남지방의 보부상으로 사회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던 천봉삼은 세곡선의 경험을 통해 백성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력에 대해 인식한다.
송파 상단의 행수가 된 천봉삼은 광주 시재 접장 선출에 나서, 다시 한 번 신분의 변화에 도전한다. 여기서 그는 접장 선출에 나선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밝힌다.
“시생의 이 보잘것없는 육신이 동무님들 모둠매에 녹아나는 것이야 겁날 것이 없소이다. 시생도 발굽을 겨우 떼어놓았을 적부터 조선 팔도 구석구석을 한둔하며, 안 다녀본 고장이 없는 원상(原商)이외다. 그러하니 동무님들 면전에서 목숨을 다한다면, 그 또한 생광일 것이오. 시생도 여기 오신 동무님들처럼 때로는 사생을 같이하던 동패를 징치하기도 하고, 심화에 부대끼다 못해 자해로 손가락을 자른 일도 있었소. 경위를 따지지 않고 모리를 취한 적도 있었고, 그런가 하면 객리 저자에서 동패의 도움으로 위중했던 목숨을 구한 적도 없지 않았소. 그러나 단 한 가지, 굶주림과 세렴에 쫓기는 향간의 양민들을 괴롭힌 적이 없었고, 양민을 수탈하려는 외방의 관원과 색리(色吏)들을 징치하지 않고 지나친 적도 없었소. 또한 당도하는 임소(任所)마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춘수전과 추수전을 바치어 원상으로서 도리와 명분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소이다.
오늘 밤 동무님들이 화덕에 꽂았던 인두를 코앞에 들이댄다 할지라도, 이 말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소이다. 다만 오늘 밤 시생이 이 지경에 다다르게 된 불찰이 있다고 한다면, 시재 접장에 천거되어 감히 차하(差下)될【지위에 오를】 것을 은밀히 간구한 것뿐이외다. 시생과 같이 알음도 없고 또한 글도 짧은 둔재가 차정되기를 바란 것이 빌미 되어 동무들이 시생을 장문(仗問)하시겠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일이며 자중지란일 뿐이오.
시재 접장에 차정이 된다 하여도 ❶관아의 두호 아래 꼭두각시놀음만 해야 한다면, 시생은 그것을 취하지 않으리다. 시생은 다만 하치않은 송파 저자의 쇠전꾼으로 박히어 십수 명에 이르는 ❷상단 식솔들을 발빈(拔貧)【가난에서 벗어남】시키고, 나아가서는 ❸삼순구식도 어려운 동패들에게 끼니 마련할 길이나 터주려는 것뿐이오.
보부청에 나아가서 그들의 뱃심에 맞는 말로 귀를 달게 하고, ❹삼문(三門) 안에 무시로 들락거리며 관원과 서리들에게 인정전을 바쳐 전매(專賣)할 물종을 얻어내는 족제비 같은 모리꾼이 되기는 싫소. 우리는 세상이 뒤집혀 천지개벽이 된다 하여도, 본색은 여전히 난전붙이일 뿐 사대부의 지체에 오르거나 출사를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 시생은 다만 그 난전붙이가 되어 있길 바랄 뿐이오.” -제6권
천봉삼은 말로써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시재 접장이 된 뒤에 접장 선출에서 자신이 한 발언을 행동으로 하나하나 지켜나간다.
먼저 관아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천봉삼은 우금을 어겼다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지만, 끝내 광주 아문과 안면을 트고 인정전을 바치라는 관아와 협상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상단의 식솔들이 가난을 벗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천봉삼은 송파에서 번 돈을 상인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모았다가, 평강에 쇠전을 마련하여 동무들의 살길을 열어준다. 상단 식구들의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평강과 원산의 상로를 개척한다. 뿐만 아니라 평강에 집을 짓고, 색상(色商)들로부터 유인되어 왜로 팔려가던 여자들을 구출해 평강의 동무들에게 가정을 만들어 준다. 상단 식구들이 가정을 이루어 안정적인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다.
세 번째는 굶주린 동패들의 살길을 열어주겠다는 약속이다. 천봉삼이 생각하는 동패는 상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임오군란에 실패한 군총들도 동패가 되고, 도적 무리들도 동패가 된다. 굶주린 백성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도적의 무리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산포 상로를 개척하는 과정에 토포한 도적들을 관에 넘기지 않고, 상단에 수용하여 상인으로 살아갈 기회를 준다. 도적들도 실상은 양민이지만 살기가 어려워 도적이 되었다고 보고, 이들이 상인으로 살아갈 길을 제공한 셈이다.
네 번째는 권력층에 동조하여 이권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천봉삼은 권력층에 빌붙어 있던 이용익과 매월을 통해 상권을 키울 수 있었지만, 권력층에 기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용익 등의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권력층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천봉삼은 서울에서 총대선인으로, 송파 쇠전의 행수로,광주 시재 접장으로 변모하며 점차 지도자의 모습을 갖춘다. 그리고 수하의 상인들을 거두는 것에서 나아가, 갈 곳 없는 백성을 상단으로 끌여들여 동패로 포용한다. 이는 천봉삼이 서울에서 보고 들은 경험이 반영된 결과다. 서울은 천봉삼에게 위정자와 백성의 삶의 관계에 대해 인식하게 했고, 지도자로 변모하여 주변 백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하게 했다.
제3부 상도(商盜). 2부에서 천봉삼이 획득한 국내문제에 대한 인식은 3부에서 임오군란을 통해 드러난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천봉삼을 비롯한 송파패들은 장안 곳곳에 붙인 괘서를 통해 민씨 집안을 비롯한 권력층의 비리를 폭로한다. 부패한 민씨 척신의 집에 칠문(漆門)을 하여 군란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행동지침을 마련해주고, 군관이 단순히 급료로 받은 모래 섞인 쌀의 문제로 그칠 것이 아니라, 쌀에 모래를 섞을 수밖에 없는 정치 상황을 알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밝혀주고자 한다.
또한 천봉삼은 보부상 조직을 이용해 군란을 진압하려는 이용익과 보부상 조직이 군란 진압을 위해 도성으로 들어올 것을 두려워하는 대원군 사이에서 보부상의 도성 진입을 막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다. 이미 괘서와 칠문에서부터 천봉삼의 입장은 군란을 통해 민씨 집안 중심의 부패 정권을 타도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이 때문에 보부상을 통해 군란을 진압하려는 이용익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된다.
원산에서 천봉삼은 왜상들이 자신들의 거류지를 이탈해 곡물 밀매에 나서고, 밀매된 곡물이 해외로 반출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이로써 천봉삼은 백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국내 정치권력의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항으로 인한 무역이 수출입 물품의 불균형으로 조선 경제에 혼란을 주는 외국 상인들의 활동과도 연관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를 통해 천봉삼의 인식이 더 이상 국내문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국제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천봉삼은 곡물의 해외 반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상과 왜상 앞잡이 처단, 원산 곡식을 왜상보다 비싼 값으로 매집, 왜국으로 가기 위해 배에 실린 곡식을 취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천봉삼은 왜선에 침입하여 밀매된 곡식을 취탈한 뒤 이를 인근 백성에게 나눠준다. 이는 곡식의 원래 주인은 백성이고, 곡식의 해외 반출로 피해 입는 것도 백성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천봉삼은 3부에서 왜국 상선에 침투할 인력과 왜상보다 비싼 값에 곡식을 사들일 재력을 갖춘 인물이 된다. 이는 2부에서 송파 상단의 행수로 광주 시재 접장이 되고자 했던 천봉삼이 3부에서 송파, 평강, 원산으로 상권을 확장하여 부와 권력을 확장해 나간 결과다.
2. 천봉삼을 응원하는 인물
최선돌
『객주』를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나서도 천봉삼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은 당연히 그의 스승 역할을 했던 조성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시 시간을 갖고 『객주』를 정리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천봉삼의 성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다름아닌 최선돌이었다.
두 사람이 문경에서 안동으로 가는 길에 처음 만난 이후로 최선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천봉삼의 조력자가 된다. 최선돌의 조력은 조소사와 천봉삼 사이를 잇는 역할도 수행한다. 천봉삼은 최선돌의 상행위 과정에서 얽힌 인연으로 조소사를 만나게 되고, 나중에 조소사를 가운데 놓고 신석주와도 연결된다.
이후 최선돌은 아내와 아이를 잃은 뒤, 한 쪽 눈마저 잃고 폐인 생활을 할 때에도 천봉삼의 일에는 촉각을 곧두세운다. 마방의 천덕꾸러기로 술추렴이나 하면서 뒷방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로 보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누구보다 예리한 판단을 내린다. 이런 그의 판단은 천봉삼이 관아 아전들의 술수와 방해에도 접장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최선돌은 접장 차출에서 천봉삼이 유리한 쪽으로 술수를 쓰고 그 때문에 죽게 되는데, 죽기 전 천봉삼에게 하는 말을 통해 그 속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자네가 그런 술수를 썼으리라곤 미처 짐작을 못하였다네. 내가 시재 접장으로 차정된 것이 바로 자네의 술수 때문이었다니… 모두에 면목이 없게 되었네.”
“내가 장폐를 당한 것은 스스로 겨워 한 일일세. 자네가 아니면 땅에 떨어진 우리 선길장수들의 체통을 누가 바로잡겠으며, 관원들에게 정소(呈訴)나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고 꾸민 일이니, 자네가 이참에 파의(罷意)를 하고 나선다면 이제부터 나와는 조면(阻面)이요 격이 질 것이네. 최씨가 광주 유수(光州留守)의 비감만 받지 않았다면, 그런 권도만은 쓰지 않았을 것이네. 그러나 사세가 그러한 판에 내가 권도를 쓰지 않았다면, 죽 쑤어 개 퍼주는 꼴이 아닌가. 자네가 낙점(落點)이 되고 말면, 우리 선길장수들의 명분을 누가 찾아주겠다는 말인가?” - 9권
최선돌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보부상 대표가 되어 ‘선길장수의 본분’을 지켜줄 것을 천봉삼에게 당부한다. 보부상의 본분을 지키는 길은 관아와의 유착을 벗어남으로써 가능하다. 천봉삼은 시재 접장으로 선출된 후 광주 관아의 농간으로 옥에 갇혀 고초를 겪지만, 관아에서 원하는 뇌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최선돌과의 약속을 지켜낸다. 그 뒤로도 천봉삼은 위정자의 반대편에 서서 이재선 사건에서는 대원군 편을 들고, 임오군란에서는 군인들 편에 선다. 이는 천봉삼에 대한 최선돌의 조력이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항상 권력에 대항하는 편에 섰다고 할 수 있다.
조소사
천봉삼이 마음에 담아 둔 여인은 조소사이다. 미모의 이 20대의 여인은 보은 객주의 짐꾼에 불과했던 아버지 조순득의 신분과 재산을 위해 여러 번 팔리다 결국 늙은 거상 신석주에게 넘겨지는 신세가 된다. 날이 밝으면 늙은 거상에게 팔려나가는 그녀의 기구한 운명 앞에 천봉삼이 나타난다. 조소사는 천봉삼에게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정념을 느끼고, 스스로 옷고름을 풀어 천봉삼과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대장부의 앞길을 막아설 수 없다는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자 굳센 절개로 천봉삼을 떠나보내고 일생 마음에 담아 둘 정인으로 삼고 신석주를 따라간다.
조소사는 집안의 여인으로 영원한 안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공간은 평강으로 구체화되었지만 집밖의 사람이자 길 위의 사람인 보부상과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천봉삼의 영원한 안주는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월이
백정의 여식으로, 조소사의 하녀였다. 오직 면천을 위해 힘든 장돌뱅이 삶을 살겠다고 당차게 말하며 자신을 보쌈한 최돌이와 혼인하고, 최돌이가 동패와의 갈등으로 사망한 이후에는 생활력을 발휘하여 방물장수가 된다. 이후 천봉삼과 조 소사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다가, 선비 유필호가 조 소사를 신석주 집에서 빼내려 할 때, 남몰래 혼자서 신석주 집에 남는다. 월이의 꿋꿋함과 주인을 위하는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 신석주의 도움으로 면천하고, 천봉삼과 혼인하여 해로한다.
『객주』는 떠돌이의 비극적 운명을 역사 속에서 구체화시킴으로써 가동되는 욕망으로 인해 안주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객주』는 집안의 이야기보다는 길의 이야기, 떠돌아다니는 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형상화하고 있다. 보부상의 존재성은 매개매개적인 중간 상인의 기능으로 구체화된 것이고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은유화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천봉삼과 월이의 합일이 가능했던 이유 또한 이러한 중간자적 존재의 화합이기 때문이다. 중간상인인 천봉삼과 천인에서 여보부상이 된 월이의 화합은 길의 사람들끼리의 화합이다. 비중 있는 여성인물 중에서 가장 수평적인 매개 공간적 인물이 월이이기 때문이다.
천소례
천봉삼의 누이. 몰락 양반 오가에게 시집 가 집안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상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이후 천소례는 헤어져 집을 나간 천봉삼의 소식을 경기 일원을 돌고 있는 보부상들 입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얻어듣자, 광주(廣州) 땅 송파 쇠전거리 어름에 있는 보행객주에서 길손들의 서답 수발에 물어미까지 하는 반빗아치 노릇으로 연명한다. 그러다 엽색행각에 미친 늙은 사내와 자식을 두고 싶다는 늙은 계집의 탐욕이 한데 어울려 소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김학준의 첩실이 되고 만다.
그뒤 김학준을 복수하려는 조성준 패거리가 김학준에게 접근하여 납치하자, 천소례는 계책을 내어 김학준을 구출해온다. 이 틈을 타 길소개는 천소례와 병상의 김학준을 협박하여 3천냥과 패물을 거머쥐고 겁간 당한 뒤 마음까지 빼앗긴 운천댁 새마님과 작당하여 배를 타고 도주한다. 그러자 소례는 김학준의 탕제(湯劑)에다 비상을 넣어 살해하고, 그 혐의를 조성준에게 덮어 씌운 뒤 임방마다 사발통문을 돌려 그를 추쇄하게 만든다. 이에 조성준은 보부상과 천소례의 추쇄를 따돌리기 위해 수적들의 칼에 죽은 이름 모를 장돌림의 사체에 그의 채장을 매달아 그가 죽은 것처럼 위계를 꾸미고, 은신한다.
그런데 조성준이 김학준 첩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오해한 천봉삼은 최선돌 및 쇠전꾼들과 계략을 꾸며 천소례를 보쌈을 한 뒤에, 결국에는 가라앉기 좋게 묵직한 돌을 섬 속에 넣은 뒤 천소례를 보쌈한 자루를 강심에다 떨구어 버린다.
그 뒤 은신하는 동안에도 자신을 배반한 길소개를 응징할 기회를 노리던 조성준이 길소개를 복수하려다 오히려 그의 농간에 말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진 그를 뜻밖에도 어렵게 목숨을 건진 천소례가 병구완 하여 구해준다. 그리고 조성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조성준은 왜 자기를 살렸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
“저를 보쌈하여 백강(白江)의 남당진 못미처서 강심에다 떨군 사람들은 인근의 저자를 돌고 있던 장돌림들이었지요. 그들은 저를 행수님을 척살시킨 장본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기 이렇게 살아 계시고 저 또한 비명을 면하였으니, 그 모해는 처음부터 하늘이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 장돌림들이 이 불측한 계집을 동여서 강심에 떨굴 제, 이제 저는 이승의 사람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하였지요.
그러나 육천 마디에 맺힌 것이라곤 죄뿐인 계집일수록 악연은 많은 법인 모양입니다. 마침 뜨내기 명화적들이 도둑질한 황아짐을 념겨받기로 약조했던 저 장물아비가 갯가의 갈숲에 과피선 한 척을 숨기고 물목을 오르내리는 선척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지요. 저를 떨어뜨린 배가 약조했던 배는 아니었습니다만, 장물아비는 그것이 밀매꾼들이 일단 강심에 떨어뜨려 가매(假埋)한 뒤 다시 건지려는 왜화(倭貨)인 줄 알고 땡 떴다 하고 부랴부랴 배를 저어 저를 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그때 숨이 끊어져 저승 문턱에 닿았을 때였지요. 그런데 요행히도 장물아비란 사람이 소싯적부터 수적질로 물속에서만 살아온 경험이 있어, 입을 빨고 코를 빨아 숨을 돌려놓았습니다.”
“싫거나 좋거나 제 서방을 모살한 여인네에게 하늘이 된급살은 못 내릴망정 어찌 그런 보은을 내렸을까… 내가 한 일은 장삿길 나간 사이에 샛서방을 본 음분한 계집을 찾아 도방의 풍속대로 징벌한 것뿐이외다. 그러나 그로 인한 떠돌이 행중에선 줄곧 오욕과 앙화가 신변을 떠날 날이 없었소.”
“그것이 한낱 부세(浮世)의 업연(業緣)입지요. 오늘 하룻밤 행수님의 병구완으로 제가 저지른 악업이 이지러질 리 만무일진대, 제게 적원(積怨)이 남아 있으시다면 소원대로 처결을 하십시오.”
“다 부질없는 소리요. 내가 이 모양이 된 것은 군산포에서 길 아무개란 위인을 만나, 그 졸개들이 쏜 연환에 맞은 까닭이오. 그것이 전부 죄만 쫓아다닌 사내가 받아야 할 업보라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금두(金頭)물고기 용에게 덤비더라고, 계집을 단념할 제 김학준에게 적몰당한 재물도 같이 단념했어야 했소. 내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불찰이 오늘날에 이르러 한낱 수적들의 접주 노릇이나 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외다.
저승 판서가 댁네에게 다시 목숨을 되돌려준 것처럼 하늘이 내게 내린 것도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니, 댁네나 나나 하늘의 보은을 입은 것으로는 같은 입장이오. 댁네는 목숨을 다시 얻었고 나 또한 대의를 깨달았으니, 더이상 사악을 품었다간 이제 하늘도 만부득이 응보를 내릴 것이오. 그땐 우리가 하늘을 원망하여 박정하달 수는 없겠지… 또한…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도 서로의 가슴에 품은 사악을 풀고, 매원에 얽매이어 평생을 부질없이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겠소? 다시 부스럼을 만들어 무엇 하겠소….” -5권
이 사건을 통해 오랫동안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던 두 사람의 악연이 해소되고 이후 천봉삼을 중심으로 협력하다가, 나중에는 부부지간의 인연을 맺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조성준
조성준은 천봉삼에게서 거상의 재능을 발견하고 상도를 가르친 스승이다. 그리고 『객주』의 전반부는 조성준의 두 차례 복수극과 관련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성준의 복수극은 송만치와 김학준을 상대로 행해지는데, 두 복수극의 근원은 김학준에게 있다. 송만치가 조성준의 전처를 데리고 달아나 문경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조성준의 전처와 송만치는 김학준이 만들어내 또다른 피해자였을 뿐이다. 김학준이 조성준의 재산을 가로채고, 조성준의 처를 겁탈한 뒤 송만치와 짝을 지어졌기 때문이다. 송만치는 조성준의 처를 빼앗을 의도가 없었지만, 상전의 뜻에 따라 조성준의 전처와 짝지어져 문경으로 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조성준은 송만치를 간부(姦夫)로 취급하여 응징한다. 조성준은 전처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 김학준의 돈과 권력 때문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송만치와 전처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 징치를 끝낸다.
조성준의 두 번째 복수는 김학준이다. 김학준은 송파에서 관아의 서리들과 결탁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만, 조성준은 자신의 돈과 아내를 빼앗은 김학준을 응징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 돈과 권력의 결탁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조성준이 인식하는 것은 김학준이 양반이고,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복수를 감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김학준에 대한 응징 역시 개인적 차원에서 시도하지만, 이마저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천소례의 계략에 걸려 마방을 빼앗기고, 김학준을 살해했다는 살인죄 누명까지 쓰고 만다. 이 사건으로 길소개는 조성준 몫의 돈을 갖취하게 된다.
방황하는 천봉삼을 다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추쇄를 뚫고 송파로 돌아와 마지막 깨우침을 천봉삼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유필호
유필호는 작품 속의 유일한 긍정적 지식인으로 등장하지만, 그의 의식은 당시 척사파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민중의 앞길을 제시할 지식인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따라서 유필호는 천봉삼 같이 대중을 이끌 만한 지도력을 가진 진보적 인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천봉삼과 동사(同事)하여 상단의 행수로 지내지만, 주인에게 일편단심 충성을 다하는 월이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그러다가 양반 가문 아내와 결혼하자, 그의 뜻에 따라 자신의 본분인 선비로 돌아간다.
3. 천봉삼과 대립하는 인물
길소개
천봉삼에 맞서는 인물로 등장하는 길소개는 30대 초반의 사나이이다. 복수심으로 생이 비틀리고 망가진 이 인물은 뛰어난 상재를 지녀 ‘천가객주’ 천오수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나, 아버지 길상문이 보부상 동패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육의전 대행수가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만을 위해 살아간다. 권력과의 야합, 국고에서 재산을 빼돌리는 법 등 삿된 상도를 터득한다. 그리고 끝없이 조선 최고의 상재(商材) 자리를 두고 천봉삼과 경쟁한다.
유필호의 계략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양반 세계에 발을 내디딘 길소개는 김보현과 민겸호의 수하에서 기생하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데,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당대의 문란한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과거제도의 문란함이다. 길소개는 과거장에서 글을 잘하는 사람과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협박하거나 속여 시험 답안지를 작성하고, 과거에 합격한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길소개가 소과(小科)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과거 제도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곡과 권력층의 탐학문제다. 길소개는 세곡선에서 세곡에 액미나 겨, 나락섬의 두께 등을 이용하여 세곡의 양을 속이는 방법으로 이익을 도모하고, 지방 고을의 수령을 회유하여 세곡으로 받은 곡식을 사적으로 거래한다. 그렇게 사들인 곡식은 왜상에게 이윤을 추구한다. 심지어 세곡을 도둑맞게 되자, 이 사실을 감영에 보고하지 않고 토포미(討捕米)라는 세목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세곡을 다시 걷을 구상까지 한다. 그래야 도둑맞은 세곡을 다시 찾았을 때,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소개의 세곡 농간은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곡이 어떻게 권력가들의 곳간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매관매직의 문제다. 길소개는 김보현과 민겸호의 청지기 노릇을 하며 그들의 재산 증식에 힘쓴 대가로 안변 고을 사또로 부임하게 된다. 안변에서의 수탈로 돈을 모아 민겸호에게 바침으로써 선혜청 낭청 자리로 승차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객주』는 진서는커녕 언문조차 읽을 수 없는 길소개를 통해 경사(京司)에 끈이 없으면 관직을 유지하기 어렵고, 백성을 수탈하여 서울 권력층에 뇌물을 바치면 능력에 상관없이 벼슬을 유지할 수 있었던 당시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길소개는 악의 축을 담당하여 당대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천봉삼은 길소개의 악행을 보며 사회 문제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길소개가 천봉삼과 악과 선이라는 두 축으로 보였던 것은 천봉삼의 사회 인식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된다.
매월이
천봉삼과 악연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매월이다. 그녀는 천봉삼을 얻기 위해 자신이 그토록 거부했던 무녀가 되고, 훗날 명성황후의 최측근 ‘진령군’에 봉해져 천봉삼의 생사 여탈권을 갖게 된다. 평안도 박천 반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신기를 보였다. 양반의 딸이 무녀가 됐다는 구설수를 막기 위해 아버지는 어린 딸을 직접 생매장했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구했다. 그녀는 이름도 개똥이라는 천한 이름으로 바꾸고, 사내도 하기 힘들다는 젓갈장수 보부상이 되어 전국을 떠돌며 자신의 신병을 고쳐 줄 사람을 찾는다. 육의전에서 쫓겨난 길소개와 동패가 되어 떠돌던 중, 죽어가는 천봉삼을 발견한 개똥이는 한눈에 봉삼이 자신의 신기를 눌러 줄, 신이 점지해 준 남자라 믿고 천봉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나 천봉삼은 그것을 허락치 않는다.
만신이 된 매월은 수직적인 공간성 속에서 매개적인 무당이기에 수평적인 공간이동을 하는 보부상 천봉삼과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매월은 수평적인 공간 이동과는 계열적으로 다른 차원 속에서 존재하도록 운명지어진 인물이다.
신석주
조선의 모든 돈과 상권을 움켜쥐고 있는 60대의 조선 최대의 거상이자 육의전 대행수이다. 권력을 옆에 끼고 조선팔도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노회한 처세술로 상인들의 왕이라 불리는 육의전 대행수 자리를 20년째 꿰차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두고 ‘운종가 먹구렁이’라 부른다. 단돈 두 냥으로 육의전에 입성해 운종가 최대 거상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는다. 그에게는 세상의 재물을 다 긁어모아도 풀리지 않는 한이 있었으니, 대를 이을 씨를 뿌릴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석주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여인이 조소사이다.
그런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악인이었던 신석주는 죽음을 앞두고 별다른 이유 없이 모든 조소사의 몸종이었던 월이에게 주어서 속량시킨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민겸호와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그의 뜻을 어느 정도는 살필 수 있다.
“듣자 하니 방자하구려. 그런 타박을 하고 있는 신 행수야말로 되 땅에서 들어오는 아편과 비단을 밀매하여 설산을 하지 않았소? 그것을 은휘한 사람이 누구이며, 오늘날 신 행수가 육의전 대행수의 자리에 오른 것은 또한 누구 덕분이오?”
“시생이 뒤늦게나마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생이 뻔질나게 당화를 밀매하고, 포구의 사람들에게 아편을 풀어 숱한 인명을 해한 것은 대감을 비롯한 권신들에게 어거지로 떠맡은 대변을 갚아내기가 너무나 힘겨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암수(暗數)를 쓰지 않고는 변리 감당을 해내기 어려웠습니다. 시생의 잠매를 대감들께서 시종이 여일하게 은휘하고 때로는 수검(搜檢)을 막아준 것은 시생에게 내준 체곗돈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지, 시생이 풍상 겪을 것을 애석하게 여기셨음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까는 감히 상감을 능멸하더니, 그것이 한이 덜 차서 이제는 나를 기탄함이 아니오?” 민겸호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 7권
신석주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무분별한 재산 축적 행위가 부질없는 것이었고, 결국은 정치권력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노비에게 주어 방면하는 것으로, 자신은 양반 권력과 다른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월이를 통해 천봉삼에게 전해진 신석주의 재산은 이재선의 사건을 일으키는 자금으로 사용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석주와 결탁했던 권력층에 대항하는 사건에 신석주의 자금이 천봉삼에 의해 사용된 셈이다.
이를 통해 『객주』에서의 상인은 ‘돈’이라는 권력을 통해 양반과 대적할 힘을 가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돈’에 초월한 존재로 묘사됨으로써, 양반 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돋보이게 된다.
4. 민씨 일가
민영익
실존 인물이다.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흥선대원군의 본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있었으나 그녀는 민태호, 민규호와 촌수가 멀었고, 대원군 역시 척신을 미워하여 별 혜택을 볼수 없었다. 간구했던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
1874년 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집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가 폭발해 사망했다. 비록 양자였지만 민승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태어나 민치록에게 입양된 명성황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세도를 부리던 민승호가 갑자기 폭사하자,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동시에 폭사했으므로 민씨 일족들은 자신의 아들을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세우기 위해 각자 암투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민비는 만약을 대비하여 오빠의 사후 양자로 민영익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상태였다. 민태호는 품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대신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민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민영익을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친하게 대했다. 민영익은 민비의 후광을 업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 이조참의(정3품)에 제수되는 등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불과 약관의 나이에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장악해 명실상부한 민씨 척족의 수장이자 조정의 최고 실력자로 등극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구식 군대의 공격으로 가옥이 파괴되었다. 『객주』에서는 임오군란 때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민영익은 이때 살아남아 난이 수습된 후 사죄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3년 보부상을 단속하는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이 되기도 했다. 친일적 급진 개화파와 갈등이 생겨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자객의 기습으로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회생하였다.
그 뒤 1885년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 판서, 한성 판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886년 조선 정부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하여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이를 밀보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여 홍콩으로 망명했다. 뒤에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부사·1894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대한제국 성립하자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성립하자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1910년 한일 합방 소식을 들었음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상하이에서 체류하다 191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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