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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고 아버지를 깨달은 빨치산의 딸···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2.09.02 14:47 입력김종목 기자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68쪽 | 1만5000원
전직 빨치산이자 ‘순수한 사회주의자’인 고상욱 부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늘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태도로 살아간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겨울 어느 날 소쿠리를 팔러 왔다가 나갈 때를 놓친 방물장수 여인을 재워주려고 방 두 칸짜리 집에 데리고 왔다고 타박하는 아내에게 상욱이 한 말이다.
빨치산 부모에게 냉소적인 딸 아리는 이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아리의 흡연을 두고 “당신 딸은 절대 담배 태우고 그런 애가 아니라고 계속 항변”하는 아내에게 한 말도 “넘의 딸이 담배 피우먼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먼 호기심이여? 그거이 바로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무신 헥명을 하겠다는 것이여!”다. 아리는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로 여긴다.
정지아 작가 아버지 정운창씨(작고)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씨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정 작가가 <빨치산의 딸> 출간 32년 만에 낸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인간의 삶에 주목한다. 왼쪽 사진은 정 작가가 1997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학위 수여식 때 부모와 함께 촬영한 것이다. 정씨와 이씨 부부 모습을 담은 오른쪽 사진은 1995년 촬영한 것이다. 정지아 작가 제공
소설가 정지아의 자전적 이야기
‘빨치산’ 부친을 감당해야 한 딸이
아버지의 죽음 뒤 장례를 치르며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와 마주
이데올로기의 의미 다시 생각
아버지가 활동한 백아산의 ‘아’ 자, 어머니가 활동한 지리산의 ‘리’ 자를 딴 이름은 놀림감이었다. “아리라는 이름 따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에 소도 때려잡을 듯 강건한 육체를 지닌, 그러니까 혁명전사의 딸에 참으로 걸맞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아리는 “흔한 경숙이 혜숙이 같은 이름이었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당황과 모멸의 순간을, 나는 당신들의 청춘을 기념하고자 했던 부모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며 살아왔고, 살아내는 중”이었다.
아리는 늘 냉담했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 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 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아리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시답잖은 학술서 한 권을 출판했을 때” 박사 논문과 책을 “동네방네 돌리고 거하게 술턱까지” 냈다는 것을 듣고는 “사회주의자라면 농민 자식, 노동자 자식을 자랑삼아야 되는 것 아닌가, 박사라고 좋아하기는, 이러니 사회주의가 망했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다.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이었다. 상욱은 치매였다.
아리가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고향 전남 구례에 내려와 상주로 조문객을 맞으면서, 그간 몰랐던 아버지의 삶이 드러난다.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면서 전장이었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적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곳”이었다.
장례식장은 수십 년 한국 현대사를 압축한 공간이다. 소설은 아리와 조문객의 회고로 비극의 현대사에 휘말린 인간 개별의 고통과 고뇌를 드러낸다. 상욱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예편 뒤 교련 선생을 한 박한우의 형이 빨치산이었다. “군인으로 빨치산 형제자매와 마주” 섰던 인물이다. 복무 때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했으나 “자신의 총알이 형과 누이와 친구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살았다. 최 약방 아저씨의 동생은 상욱 곁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자기 몫까지 잘 살라는 동생의 유언을 그에게 전해 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는 걸.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 대신이었다.”
월남전에서 다리를 잃은 노인네는 근조 화환을 지팡이로 후려 치며 장례식장에 등장한다. “나는 베트콩 때려잡던 사램잉게 뽈갱이 조문하먼 안 된다는 것이여! 나가 고상욱이 때려잡았간디?” 술 한잔 들어가자 멀쩡해진 이 노인네가 아리에게 건넨,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담은 문척 모래사장 사진엔 열댓의 상욱, 그와 함께 입산한 노인네 형의 모습도 담겼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상욱은 “입만 열면 옳은 말 하는 잘나고 똑똑한 양반, 또 한편으로는 잘나서 빨갱이짓 하다가 집안 말아먹은 양반”이자 “고씨 집안의 자랑인 동시에 고씨 집안 몰락의 원흉”이었다. 아리의 사촌 오빠는 육사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했다.
작은아버지에게 형 상욱은 원수였다. “집안이 망한 것도,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도, 할아버지가 군인 손에 죽은 것도 다 아버지 탓”이라 여겼다. 술에 취하면 찾아와 “니는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묵었냐?”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상욱은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동생의 모진 말을 묵묵히” 견뎌냈다. “(구례) 반내골 사람 중 조문에 빠진 사람이라곤 작은아버지뿐”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죽음 앞에서라도 평범한 형과 아우로 화해”할 수 있을까.
소설 제목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제목의 ‘해방’은 ‘사회주의 해방’을 이루지 못한 “패배의 역사”에서 늘 한 인간으로서 실천한 나눔과 연대, 솔선수범의 삶으로 이룬 또 다른 해방을 가리키는 듯 하다. 죽음과 장례를 계기로 아리는 냉담과 냉소, 오만과 무례를 반성하며 아버지의 삶과 의미를 다시 들여다본다.
“아버지는 언제나 인간을 신뢰했다. 보증을 서줬더니 말도 없이 야반도주해버린 먼 친척도 아버지는 원망하지 않았다.” 동네일에 앞장섰다. 위험한 일에 먼저 나섰다.
심한 화상으로 검지 한 마디가 뭉그러진 딸의 친구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베트남 어머니를 둔 어린아이와도 친구 하며 지냈다.
“아이고, 먼 놈의 남자가 형광등 한나도 못 갈아 낀대? 윤재는 그 옛날에도 혼차서 뚝딱 해치우등만.” 아내가 첫 남편 ‘윤재’와 비교해도 화 한번 내지 않았다. 딸에게 “담배 한까치 도라”던 이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였다.
소설은 정지아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 정운창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두 사람은 빨치산 활동 공간이었던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한 자씩 따 지아라 지었다.
정운창은 2008년 5월1일 노동절에 작고했다. 문학평론가 오창은과 진행한 대담(‘자음과 모음’ 2013년 6월)을 보면, 정운창의 이데올로기를 짐작할 만한 말이 나온다. “아버지는 민중민주주의(PD)와 생각이 비슷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속해 있던 민족민주주의(ND)는 ‘과격한 급진주의자’라고 비판하셨어요. 어쨌건 아버지는 계급성을 언제나 더 우선에 놓으셨죠.”
정지아는 장례식을 치르면서 장편소설 작업을 결심했다. “이데올로기로만 아버지를 볼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고, 아버지라는 전체 스펙트럼 중에서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다시 따져보고 싶다”고 했다.
소설의 주변 인물들은 허구를 섞었는데, 교련 선생이자 퇴역 군인 박한우는 실존 인물이다. 정운창이 말년 제일 친하게 지내던 이다. 두 사람은 어느 신문을 보는지부터 정치적 입장까지 사사건건 대립했다. “왜 저분하고 가깝게 지내느냐”는 정지아의 질문에 정운창은 “그래도 저놈이 인간성은 가장 좋다”고 답했다. 정지아는 이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저보다 훨씬 확고하신 분이지만, 그 이데올로기만으로 사람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지 않으셨던 거잖아요. 그걸 인간과 구분해서 바라볼 줄 알았던 거죠. 아버지한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었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기를 10년,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을 출간하고 32년 만에 낸 <아버지의 해방일지>엔 이런 표현이 나온다.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빨치산의 딸>을 낸 건 정지아가 스물다섯 살이던 1990년이다. 부모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실록’이다. “빨치산의 딸로서 민중에게 부여받은 책임과 의무” “노동해방을 쟁취해낼 천만 노동자의 딸”이란 사명감으로 쓴 책이다. ‘실천문학’에 연재한 뒤 출간했다. 출간되자마자 판금 조치당했다. 정지아는 이 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정지아는 기자와 통화하며 “<빨치산의 딸>을 쓸 때만 해도 이데올로기나 부모와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쨌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동시대에 빨치산이나 사회주의자로부터 고통을 당한 사람들도 함께 사는 거고요.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빨갱이는 다 죽일 놈이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위대한 것도 아니고요. 시대가 낳은 비극입니다. 구례라는 무대에서는 비극의 양 피해자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고요.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갈린 정치권 문제에 대한 조금의 해답이면 좋겠습니다.”
정지아는 소설에서 빨치산 동료들이 ‘통일애국인사 고상욱 추모제’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장례식장을 찾은 장면을 묘사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의 축소판을 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의 지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성토하는 대신 서로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중이었다. 묘하게 평화로웠다. 어쩌면 죽음으로서야 비로소 가능한 평화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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