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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진 상앙변법

by Oh.mogilalia 2025. 3. 31.

開阡陌封疆 廢井田 民得買賣 廢除分封制 什伍連坐 重農抑商 平斗桶權衡丈尺 焚詩書而明法令

십오제(什伍制): 5가구/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상호감시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고, 한 집에서 죄를 지으면 같은 단위로 묶인 나머지 네 집도 연좌제를 적용해 처벌함으로써 상호 감시용으로도 활용했다. 이 제도는 훗날 명청대의 이갑제, 조선의 오가작통제, 일본 에도 막부의 고닌구미(五人組)제와 같이 후세의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 심지어 근현대 조선총독부와 북한(소위 5호담당제)도 활용할 만큼 효과가 좋았다. 상앙의 가장 큰 업적으로, 동아시아 특유의 주민 통제 수단의 조상격이라 할 만하다.
- 什伍 갖은자로 열 사람, 다섯 사람을 뜻함
억상정책: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로 상업을 농업보다 낮게 보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당장 농업의 생산량을 늘린 사람은 요역을 면제해 준 반면, 상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은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러나 상업을 매우 하찮게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에 진나라가 어느 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했다.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징세와 징병의 대상인 양민의 수를 늘려 재정과 군대를 확충했다.
군공수작제: 누구라도 전쟁터에서 국가를 위해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렸고, 반대로 군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이는 국가에 대한 백성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민심을 모으기 위함이었으며, 반대로 국가나 군주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삼족을 멸하는 등 각종 엄벌을 내렸다.
예를 들어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는 데 공헌했거나 불을 끄다가 죽었다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공을 세우고 죽은 걸로 인정했으나, 반대로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도망치거나 반역을 꾀하는 걸로 규정했다. 이때 병사가 벤 적의 머리를 작위 1등급과 동등하게 적용하게 하면서 전시에 벤 적군의 머리를 '수급(首級)'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수급을 취했다"라는 말은 동시에 엄마 나 승진했어라는 의미였다. 평민에게 주어진 것은 하급의 작에 한정되었고 높은 작을 받으려면 아군의 손실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평민이 높은 작에 오르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전쟁에서 공훈을 제대로 세우면 더 많은 토지를 할당받고, 지위도 올라가 출세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전투력이 급속히 상승하였고, 이것은 후에 진나라가 수행할 정복전쟁, 엄격한 법가의 규율과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행정조직, 군대조직 모두 적군의 목을 딴 순서대로 계급이 정해지는데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바로 불이익이 떨어지니 조직의 살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진나라는 이웃에 서융과 접해있는 등의 상황으로 인해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하니 이러한 정책이 안착하는 데 별 탈이 없었을 것이다.
악습 및 구습 타파: 진나라에 내려오는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 덕분에 진나라는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같이 변방 오랑캐가 세운 야만국이란 중원 사람들의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게 됐다. 물론, 이는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었기에 진효공은 악습 퇴치령을 몇 번이고 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잔재가 남았는지 소양왕의 친모인 선태후의 경우, 죽으면서 자신의 애첩을 순장시키려다 철회했다. 심지어 훗날 호해가 자기 형제자매와 서모들을 순장한걸 보면 순장은 완전히 퇴치되진 못했는듯 하다. 물론, 호해가 워낙 상상초월의 폭군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게다가 소양왕 시기에 선태후가 자신이 죽고 순장을 하려고 했을 때 용예라는 자가 말려 그만뒀다는 것을 보면 순장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했다 쳐도 그게 나쁜 것이라는 인식은 확실히 심어준듯 하다.
신고제 확립: 타인의 잘못을 신고한 자는 상을 주고 타인의 잘못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적에게 투항한 것과 같은 죄로 처벌하는 신고제를 확립했다.
함양 천도: 원래 대대로 수도였던 옹 땅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했기에, 지금의 서안(장안) 부근에 있던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효공의 5대손인 시황제 때의 천하 통일 이후로 함양은 천하 굴지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시황제의 손자인 진왕 자영이 항우에게 피살되고 함양이 파괴될 때까지 수도로 번성했다. 함양이 훗날 장안이 되어[10] 전한과 당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린 것은 유명한 이야기. 현재에는 과거보다야 위상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시안시라는 이름으로 산시성의 성도로 군림하고 있다.
상앙은 일명 신상필벌로 요약할 수 있는 법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때 제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행한 일화가 있다.
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법령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백성이 새 법령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아직 널리 알리지 않았다.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그래서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의 남쪽 문에 세우고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백성을 불러 모아 말하길,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다.
民怪之 莫敢徙 複曰
그러나 백성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하길
能徙者予五十金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50금을 주어
以明不欺 卒下令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어떤 제도나 정책을 시행할 때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 현대에도 종종 인용되곤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이목지신(移木之信)으로, 약속을 지켜서 신뢰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상앙이 이렇게 법 제도를 확실히 하자 시민들은 그 제도를 칭찬했는데, 상앙은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이유인 즉 "법을 싫어하는 자 못지 않게 찬양하는 자도 잡아야 한다"라고. 즉 '이런저런 감정을 넣지 말고 그냥 지켜라'는 의미다.

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 번 일어났다. 변법 자체가 기득권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진나라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 서, 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 번 중단 위기를 맞았다.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 개였다 하니 실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를 용서하지 않았고, 변법을 어길 경우에는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했다. 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자가 변법이 불편하다며 일부러 어기자, 태자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스승이었던 공자 건(효공의 형이자 태자의 백부)에게 죄를 물어 처벌했고, 다른 스승에게는 먹으로 죄명을 얼굴에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이후 건이 또 죄를 저지르자 코를 베는 형벌에 처했고, 결국 건은 영원히 은둔하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건과 태자는 상앙에 대해 증오를 품게 된다.

이렇게 밀어붙여진 개혁은 진나라를 크게 안정시킨다. 《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行之十年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되자
秦民大說 진나라 백성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道不拾遺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으며
山無盜賊 산에는 도적이 없고
家給人足 집집마다 풍족하며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했다.
民勇於公戰 백성은 나라를 위한 싸움에는 용감하고
怯於私鬦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었다.
郷邑大治 도시나 시골이 모두 잘 다스려졌다.

이렇게 착실히 쌓은 국력을 바탕으로 상앙의 진나라는 하서(河西) 지역을 수복했고[11] 당시 마릉 전투 이후 흔들리는 위나라를 치자는 주장을 해 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패권 국가였던 위(魏)나라를 제압하고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반대로 위나라는 이때부터 약해졌고, 하서 지역을 잃어 도읍인 안읍이 위급해지자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다소 졸렬한 꼼수가 있었는데, 상앙과 친분이 있었던 공자 앙(卬)이 위나라의 사령관이 되자 상앙이 회담을 구실로 그를 유인해 사로잡자마자, 기습대를 보내 사령관 없는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것이다.[12]

결과적으로 진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대해졌는데, 양인이 많아지면서 병력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었기 때문이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효공과 함께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군주가 된다. 공손앙이 사실 상앙이 된 때도 이때인데 제후에 봉해져 '상' 땅을 봉토로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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