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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희망의 끈 - 히가시노 게이고

by Oh.mogilalia 2023. 1. 30.

어제부터 재밌게 읽는 중 발견한 우리말 단어

일단 조의를 표하고 나서, 처리할 일이 많을 텐데 힘들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힘들다고 했죠.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허둥거리고 있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자신이 전부 맡아서 처리하겠다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했지만, 와타누키는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자신은 이런 일에 익숙하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고마웠죠. 달리 부탁할 사람도 없던 차에 마침가락이지 뭐예요. 와타누키라면 믿을 수 있고 야요이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래 준다면 고맙겠다, 잘 부탁한다, 그렇게 대답했죠. 그랬더니 며칠 후에 위임장을 갖고 여기로 왔더라고요

마침가락 [/-까-/] : 공교롭게 일이 딱 들어맞는 것. 우연하게 일이나 물건이 딱 들어맞음.

읽다가 울었다. ㅎㅎ~

28

눈을 뜬 유키노부는 평소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윗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후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딱히 변한 건 없었다. 차광 커튼 때문에 방 안이 어두컴컴한 것도, 벗어 던진 옷이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도 평소 그대로다.
파자마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현관에 모나의 통학용 신발이 놓여 있었다. 모나는 보통 유키노부가 출근하고 난 뒤 학교에 간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본 후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이를 닦고 세수를 한 후 그대로 집을 나서는 것이 평소 패턴이다. 아침은 대개 서서 먹는 국숫집에서 때운다.
그러나 방으로 향하려던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평소와 뭐가 다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냄새는…….
아주 희미하지만 장국 냄새가 풍겼다. 레이코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살금살금 식당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문을 열었다.
모나가 교복 차림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달걀말이가 담긴 접시와 밥공기, 그리고 된장국 그릇이 놓여 있었다.
모나가 젓가락질을 계속하며 유키노부를 힐끔 쳐다봤다.
“안녕.”
“어, 그래……. 안녕.”
유키노부는 부엌 안을 두리번거렸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얹혀 있었다. 다가가서 뚜껑을 열어 보니 두부 된장국이 들어 있다. 장국 냄새의 정체는 이것인 모양이다.
“된장국, 네가 끓였어?”
모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모나가 아빠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다.
“나 말고 누가 끓이겠어.”
“제법이네.”
“뭐가. 별것도 아니야.”
모나는 마지막 남은 달걀말이 한 쪽을 입에 넣고 빈 그릇들을 포갰다.
“아, 설거지는 아빠가 할게.”
“괜찮아. 아직 시간 있어.”
모나가 포갠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싱크대로 가져간다. 머쓱해진 유키노부는 그 자리에 선 채 멀거니 모나를 바라보았다.
식당을 나온 모나가 소파 위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된장국, 먹고 싶으면 먹어.”
툭 내뱉듯이 말한다.
“그래도 돼?”
“맛은 별로 없겠지만.”
“아니야, 그럴 리가.”
“먹어 보지도 않고서.”
“그렇긴 하지만…….”
모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유키노부는 뭔가 말을 걸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애가 닳았다.
“저녁에 뭐 먹고 싶니?”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모나가 걸음을 멈췄다.
“오늘 저녁?”
“된장국 끓여 줬으니까 나도 뭔가 해야지.”
“아빠, 요리할 줄 알아?”
“대단한 건 못하지만, 조금은 할 수 있어.”
“그럼 만두.”
“알았어.”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저기, 하며 모나가 유키노부를 향해 돌아섰다.
“나, 고등학교 들어가면 예대를 목표로 공부할 거야.”
“예대?”
“예술 대학 말이야. 영화 공부를 하고 싶어.”
“너, 영화 좋아해?”
모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유키노부는 살짝 놀랐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빠도 영화 좋아해. 내 추천 영화는…… 그래, ‘뷰티풀 마인드’나 ‘쇼생크 탈출’.”
“알아. 다 봤어.”
“그래? 어디서?”
“DVD. 아빠 걸로.”
“뭐?”
유키노부의 방 책장에는 영화 DVD가 잔뜩 꽂혀 있다.
“나한테 말도 없이?”
“미안.”
“아니야, 괜찮아.”
유키노부가 집에 없을 때 몰래 방을 뒤진 모양이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모나가 잠시 뜸을 들였다.
“사진, 꺼내 놔도 돼.”
“사진?”
“언니랑 오빠 사진. 그리고 엄마 사진도.”
“아아…….”
유키노부의 방에는 에마와 나오토의 사진도 보관되어 있다. 그걸 본 모양이다.
알았어, 라고 유키노부는 대답했다.
“그럼 나, 다녀올게.”
“응, 조심해서 다녀와라.”
모나가 배시시 웃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유키노부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열기가 전해지면서 된장국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모나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던 밤을 떠올렸다.
맨 먼저 모나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유키노부와 레이코가 새 생명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불임 치료에는 시간과 체력, 재력,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력이 요구된다. 특히 여자의 몸에는 부담이 크다. 그런 난관에 도전하면서까지 자신들은 아이를 갖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레이코의 몸에 깃든 생명이 엉뚱한 부부의 수정란일지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과 혼란, 고뇌를 설명하고, 자신과 레이코가 태어날 아이를 자신들의 아이로 받아들이기까지 무슨 얘기를 나눴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기억나는 한 자세히 들려주었다.
죽음이 임박한 레이코와 주고받은 얘기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레이코가 갈피를 못 잡는 유키노부의 마음을 간파했다는 사실도 말했다.
“엄마가 세상을 뜬 후에는 무엇이 모나를 위한 길인지 줄곧 생각했어.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역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거였지.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난 거야.”
모나의 생물학적 엄마가 살해당하는 바람에 진실을 얘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고 유키노부는 고백했다.
“결과적으로는 너를 여러 가지로 힘들게 하고 말았지만, 무엇이 모나에게 최선인지 아빠 나름으로 많이 생각했어. 네게 결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단다. 어떻게든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지. 왜냐하면……,”
유키노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아빠는 모나를 사랑하니까.”
유키노부가 얘기하는 동안 모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너무 놀라워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얘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모나는 허공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모나야, 하고 유키노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빠 말, 이해하겠니?”
모나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 나서 유키노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홍색 입술이 천천히 열리더니 “잘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뭐?”
“얘기가 너무 길어.”
“아……, 너무 어려웠나?”
“어렵다기보다 지루해. 수정란이니 뭐니, 그런 거, 솔직히 말해서 아무 상관도 없어. 그게 그렇게 중요해?”
의표를 찌르는 모나의 말에 유키노부는 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보다, 하고 모나가 말했다.
“맨 마지막에 한 말, 그거면 충분해. 일단 지금은.”
“마지막 말?”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유키노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돌이켜 보고 화들짝 놀랐다. 딸이 뭘 원했는지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역시 나는 어리석은 아빠로군,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지금은’이라고 모나가 덧붙인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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