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만남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는 어떻게 만나는가? 다음 글은 몇 가지 단편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서로 다른 두 사회는 느낌으로 만난다. 자주 안타까움으로 만나고 이따금 분노로 만난다. 두 사회가 부딪히면서 생겨나는 느낌은, 생겨날 때부터 아니 생겨나기 이전부터 나아가는 방향이 항상 한쪽으로 정해져 있다. 받는 쪽에선 나의 느낌이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친화력이 없으면 느낌도, 안타까움도, 분노도 없는 법이다.
스승은 수치심부터
수치를 모르는 스승들
옛 현인(賢人)이 말했다. 무지한 사람은 가르침을 통하여 알게 할 수 있으나, 수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수치를 알게 함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다면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스스로 스승이라 칭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실로 기막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1998.11.21) 한국교총 집회에 모인 이른바 스승들은 “교육부 해체!”와 “이해찬 장관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국교총은 줄기차게 교원노조에 반대해왔다. 그들이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이유 중에 스승의 논리라는 게 있다. 즉 교사는 스승이지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교원노조를 향해 '스승의 품위'를 지키라고 훈계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교육부 해체!”와 “이해찬 장관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친 것이다.
나도 대학생 때 꽤 과격한(?) 편이었다. 그래도 아직 학생일 때였다. 당시 우리가 외쳤던 가장 과격한 구호는 “중앙정보부 해체!”였다. “문교부(당시 이름) 해체!”까진 갈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 물러나라!”에 머물렀지 “박정희 자폭하라!”까지 나가지도 못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과격한 구호에도 '품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세상이 달라진 구석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장장 50년 동안이나 하나뿐인 교원단체로 인사, 행정 등 각종 이권에서 교육부(문교부)의 사랑을 독차지해온 교총이 “교육부 만세”를 부르지 않고 “교육부 해체”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해체'를 외쳐도 교육부가 해체될 리 없으니 우리는 이해찬 장관이 자폭하지 않기를 바라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일찍부터 사회주의가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음을 알아서 사회주의에 이끌리지 않았다고 말한 이해찬 교육부장관에게 나는 동정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 빗나간 발언을 했다면 '이해찬 장관 자폭하라!'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난 얼굴로 '해체'와 '자폭하라'를 외치는 모습을 꼭 봐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그들의 제자 학생들이다. 제자들이 봤더라면 그들도 조금은 수치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다지 분노케 했을까.
우선 교원정년 단축계획이 그들을 분노케 했다. 나는 그 내용을 듣고 2년 전에 있었던 프랑스 트럭운전사들의 파업을 돌이켜 생각했다. 당시 파업에 돌입했던 트럭운전사들의 요구 중에는 60세로 되어 있는 정년을 55세로 단축해줄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교원들과 정반대의 요구를 했던 셈이다. 물론 퇴직 후 연금제가 아직 허약한 한국과 달리 프랑스의 연금제는 탄탄한 편이다. 그러나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랑스의 트럭운전사들에게 '세대간의 연대'가 있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 개념조차 없다는 것이다. 파업에 참여했던 한 트럭운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58살이다. 트럭운전은 실로 고되고 어려운 직업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다. 나는 60살까지 일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60살 너머까지 일하고도 싶다. 그러나 실업자가 되어 고통받고 있는 자식들을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정년을 단축하고 또 주당 근무시간도 단축하여 생기는 일자리에 젊은 실업자들을 고용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아이엠에프 관리체제 이후에 실업자가 급격히 늘고 있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고 있다. 즉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넘겨 주는 '세대간의 연대'가 프랑스 못지않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스승들은 이 사회적 요구에 대해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스승다운 스승이라면 정부의 교원정년 단축계획을 반대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야 했다.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앞서야 하며, 따라서 교원을 확충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했어야 옳았다. 그런 문제제기는 없고 무조건 정년 단축에 반대만 했다. 집단이기주의는 이렇게 필요한 토론조차 제기될 수 없도록 막아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부의 방학책 판매금지조치도 교총을 분노케 한 기폭제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 동안 일년에 두 차례 방학 때마다 학생들에게 방학책을 판매한 이익금으로 교총의 재정자금으로 충당해왔는데 그 자금이 이번 교육부의 조처로 날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스승들이 분노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오랫동안 스승의 단체라는 데서 학생들한테 이윤을 뽑아내는 행위를 버젓이 해왔다는 얘기다.
교육부와 교사단체 사이에 이견이 생기는 건 당연하고 따라서 토론이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예컨대 방학과제는 꼭 필요한가, 아니면 학생들의 자율에 맡길 것인가? 또 방학과제가 필요하다면 그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전 읽기를 권하면 되지 않는가? 등의 토론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토론이 아니라, 이권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분노하는 그들에게서 수치심을 찾는다는 것은 내가 파리에서 포장마차집을 찾는 것 이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회색의 돈(argent gris)'이라는 프랑스 말이 있다. 이 말을 확대하면, 돈에는 세 가지가 있다. 깨끗한 돈, 검은 돈 그리고 회색의 돈이 그것이다. 깨끗한 돈이란 노동의 대가로 받는 떳떳한 돈을 말한다. 더러운 돈이란 횡령, 착복, 탈세, 협박, 사기, 뇌물 등으로 부당하게 획득한 돈으로 법의 제재를 받아 마땅한 돈이다. 그리고 회색의 돈이란 깨끗한 돈은 아니지만 법의 저촉을 피할 수 있는 돈을 가리킨다.
회색의 돈은 법의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대신, 받는 사람에게 수치심을 요구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교사가 부임 초기에 '봉투'를 받을 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수치심이다. 그런데 이 수치심엔 면역성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치심은 없어지고 회색의 돈은 점점 깨끗한 돈인 것처럼 인식된다. 나중에는 아예 회색의 돈을 요구하기까지 이른다.
더러운 돈이 만연된 사회에서 회색의 돈은 깨끗한 돈인 듯 인식되기 쉽다. 흡사 검은색 바탕 위의 회색점이 흰색으로 보이는 착각현상과 같다. 반대로 더러운 돈이 없는 사회에선 회색의 돈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검은 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얀 바탕 위의 회색점이 검은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더러운 돈과 회색의 돈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하나의 가정, 즉 더러운 돈을 없애려면 회색의 돈도 없애야 하며 또 회색의 돈을 없애려면 더러운 돈도 함께 없애야 한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더러운 돈을 없애기도 어렵지만 회색의 돈의 없애기는 더욱 어렵다.
특히 지금의 한국 사회처럼 회색의 돈이 수치심을 불러오지 않게 돼버린 상황에선 말할 수 없이 어렵다. 그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회색의 돈에 대해 경종을 울려 마땅한 스승들이 오히려 회색의 돈을 탐하고 취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된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나는 '간접수당'이란 게 무엇인지 최근에 알았다. 학교마다 매일 한두 시간씩 보충수업을 실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한테 등록금과는 별도로 보충수업비를 거두고 있다고 했다. 그 보충수업비를 7:3이나 8:2로 나누어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가 '직접수당'을 받고 교장과 교감은 간접수당을 받는다고 했다.
직접수당은 직접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에 대한 수당이라 치고 간접수당은 무엇인가. 간접적으로 수업을 담당한다는 뜻인가. 수당을 나누는 비율에서 직접수당의 몫이 크긴 하다. 그렇지만 교장과 교감은 모든 보충수업에 대한 간접수당을 받게 되므로 교사들이 받는 직접수당보다 더 많은 수당을 챙기게 된다. 분필가루를 먹으며 수업을 실시하는 교사보다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교장과 교감이 더 실속을 차리고 있는 셈이다. 마치 여러 마리의 곰에게 재주를 부리게 하고 돈을 거두어들이는 중국 사람의 모습이다.
직접수당도 회색의 돈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사설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실시하는 보충수업에 대한 반대급부이기 때문이다. 보충수업비를 각출한다는 것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간관계를 '돈관계'로 타락시키고 실추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스승다운 스승이라면 당연히 반대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실로 역설(逆說)인 것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말하는 교원노조의 교사들은 이 보충수업 실시에 반대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스스로 노동자가 아닌 스승이라고 주장하는 교사들은 보충수업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역설에서 하나의 가정과 질문을 할 수 있다. 만약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충수업비 없는 보충수업을 실시한다고 가정할 때,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염불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은 승려와 똑같은 스승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직접수당은 그래도 이유있는 회색의 돈이다. 교장과 교감이 받는 간접수당은 차라리 검은 돈에 가깝다. 나는 교장과 교감이 받고 있는 간접수당이 '착복'과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보충수업을 못하겠다는 교사들을 은근히 윽박지르고 또 보충수업 반대 의견을 앞장서서 가로막고 있다고 한다. 보충수업에 따른 직접수당과 간접수당에 얽힌 국가, 학교법인과 교사 사이 그리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함수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교장과 교감을 비롯한 교총의 교사들이 스스로 노동자가 아니라며 교원노조에 반대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
교사가 노동자가 되면 국가와 학교법인이 교사들을 고용하는 사용자가 된다. 따라서 교사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사용자인 국가나 학교법인이 지급해야 한다. 그러면 교사들은 보충수업을 실시한다고 해도 학생들한테 돈을 거둘 명목이 없어진다. 설사 거두어 수당을 받는다 해도 국가나 학교법인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직접수당은 지금보다 적어지고 간접수당은 없어질 게 틀림없다. 여기서 교원노조 합법화에 특히 교장과 교감이 앞장서서 반대했던 까닭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라 스승이다”라는 그들의 주장에는 '우리는 노동의 정당한 대가보다 회색의 돈을 좋아한다'라는 속내가 들어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학교에선 학비도 잡비도 없으므로 돈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검은 돈도 회색의 돈도 학교 근처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정치인들 중에는 간혹 검은 돈과 회색의 돈을 취하는 사람이 있다. 피에르 베레고부아라는 이름의 수상이 있었다. 노동자 출신인데 독학으로 경제통이 되어 미테랑 대통령 밑에서 경제장관을 지냈고 수상에도 올랐다.
그가 수상에 오른 것은 미테랑 정권의 말기인 1992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1년여가 지난 1993년 5월 1일 노동절날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는 장관 시절 파리에 집을 살 때 모자라는 100만 프랑(약 2억원)을 국제 브로커이며 미테랑의 친구인 사람에게서 빌렸다. 문제는 무이자로 빌렸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은 무이자로 빌리면서 국제 브로커에게 무슨 혜택을 주었느냐고 사정없이 따졌다.
하원의원선거 유세장에서 사람들은 “무이자!”라고 외치며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사회당은 선거에서 참패했고 그는 수상 자리를 우파에게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아 정확한 자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회색의 돈'을 취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그 일이 사회당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다는 책임의식이 겹쳐 끝내 목숨을 끊게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느꼈던 수치심과 책임의식, 그런 것들은 한국의 정치인에게서도 찾기 어렵지만 한국의 자칭 스승들에게서도 찾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만감이 교차했을 베레고부아 수상은 왜 5월 1일 노동절날을 택했을까? 자신이 노동자였다는 것을 선언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교사는 스승인가, 노동자인가?
교사는 스승인가, 노동자인가? 이 질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사들이 스승이면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제자들에게는 스승이 되고, 국가나 학교법인에게는 노동자가 되면 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스승다운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고, 국가나 학교법인에 대해서는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받아내는 노동자가 되면 되는 것이다. 전통의 가치와 현대의 가치, 동양의 가치와 서구의 가치를 함께 획득함이다.
스승다운 스승은 결코 스스로 “나는 스승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스승이란 말에는 좋은 뜻의 전통적인 가치가 들어 있다. 스승은 사람들에게 존경, 인품, 겸허, 엄격, 솔선수범, 청렴, 사표(師表)와 같은 말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스승이다”라는 주장은 “나는 존경스럽다” “나는 인품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염치가 있거나 겸허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결국 “나는 스승이다”라는 주장은 “나는 스승이 아니다”라고 밝히는 것과 같다.
나는 교사들이 스스로 노동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때, 스승의 길도 함께 열린다고 믿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제 노동의 정당한 대가, 즉 깨끗한 돈에 만족하고 있는 사회계층은 노동자들뿐이다. 아니, 제 노동의 정당한 대가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형편이다. 다른 계층은 기생집단이거나, 아니면 거의 모두 회색의 돈에 적당히 물들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이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정당하게 제 몫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며 사회적 요청이다. 또 교사가 노동자라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그 위에, 노동이나 노동자에 대해서 그른 인식이 퍼져 있는 한국이기에 교사들의 노동자 주장은 더욱 중요하다.
나는 교사가 스스로 노동자라고 주장할 때 제자에 대하여 스승이 되는 첫걸음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스승이 되는 첫걸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사회가 노동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한나라당의 김정숙이라는 의원은 국정감사 때 이해찬 장관에게 “교원들을 노동자 취급하고 그렇게 관리하려면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의 '노동자 취급'이라는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노동자 취급'이 어떻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노동자'가 어떻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또 '노동'이 어떻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김정숙 의원에게 묻는다. “김정숙 의원은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고 노동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라고.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국민의 대다수는 노동자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사람이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를 업신여기고 있다면 당연히 의원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마땅하다. 물러나야 할 사람은 이해찬 장관이 아니라 김정숙 의원 자신인 것이다.
김정숙 의원은 또 “악쓰고 달려드는 사람 몇몇 때문에 교원노조를 인정해야 되느냐”고 이해찬 장관에게 따졌다. '악쓰고 달려드는'이란 표현에서 이미 정작 누가 '악쓰고 달려드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국정감사 하는 의원이라도 말을 막 하면 안 된다. 당시 한겨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53.7%가 교원노조 합법화에 찬성하였고 반대 의견은 29.8%에 지나지 않았다(<한겨레> 1998년 12월 11일자). 이 여론 조사도 우리에게 정작 누가 '악쓰고 달려드는' 사람인지 알게 해준다. /홍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