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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계

죽은 호랑이

by Oh.mogilalia 2005. 1. 18.

강원도 태백산 깊은 계곡에 아주 날쌔고 무서운 호랑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놈은 한번 뛰면 십리를 넘었고 사슴이나 토끼 따위의 작은 짐승은 그놈이 한번 울면 오금을 떨었다. 하지만 그놈은 날쌔고 신비로웠기 때문에 아무도 그놈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추수가 끝나면 그 호랑이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곤 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진 이 호랑이에 대한 명성은 마침내 물 건너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의 부자들은 한국의 호랑이를 갖고 싶어했기 때문에 너도나도 사냥꾼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 왔다.


그들은 수많은 호랑이를 잡아 죽였는데, 그들이 죽인 호랑이 숫자만 500마리가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백산 호랑이만은 잡히지 않았다. 미국의 부자들은 한결같이 그 호랑이를 탐냈지만 잡기는커녕 오히려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래서 그들은 태백산 호랑이를 \"왕호랑이\"라고 불렀다.


30년이 지나도록 끝내 왕호랑이를 잡지 못하자 미국의 부지들은 모두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말 대단한 호랑이였다. 미국의 부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한 사람의 유능한 사냥꾼을 태백산 계곡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는 미국에서 제일가는 지혜와 솜씨를 가진 아주 무서운 사냥꾼이었다.


그 사냥꾼은 오자마자 태백산 으슥한 곳에 캠프를 치고 숨어서 왕호랑이의 습성과 생활 방식을 망원경으로 자세히 조사했다. 그 결과 백인 사냥꾼은 이 호랑이를 잡는데 총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그는 아주 맛있게 만든 커다란 햄버거를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다른 사냥꾼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첫날 새벽에 커다란 햄버거를 산 속에 던져 놓고 낮잠을 즐겼다.


왕호랑이는 새벽에 먹을 것을 잡으러 나왔다가 아주 이상한 고기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이제껏 자기가 맛보지 못한 묘한 것이어서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조금 썩은 듯한 냄새였지만 그 냄새가 그놈의 코를 자꾸만 간지럽게 했다.


그러나 조심성이 많은 왕호랑이는 이 고깃덩어리가 사냥꾼의 미끼인지도 모른다고 경계하여 하루 종일 그 고깃덩어리를 지켜보았다. 그래도 별 이상이 없자 슬쩍 맛을 보았다. 약간 역겨운 맛이 톡 쏘았으나 혓바닥을 간지럽게 하는 독특한 맛에 그 햄버거를 단숨에 먹어 버렸다. 그 덕택으로 왕호랑이는 그날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날 아침, 백인 사냥꾼은 자기가 놓아둔 햄버거가 없어진 것을 알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는 같은 크기의 다른 맛을 가진 햄버거를 던져 놓았다. 왕호랑이는 오늘도 재수 좋게 어제와 같은 고깃덩어리가 숲 속에 떨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어슬렁거리다 또 다시 그 이상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어제 것보다 더 맛이 좋았다. 두 번씩이나 햄버거의 맛에 길들여진 이 호랑이는 다시 사냥을 한다는 게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왕호랑이는 다음 날부터 뛰어 가는 법, 뛰어 오르는 법, 혹은 사냥하는 법 따위를 연습하지 않았다. 오로지 숲 속에서 주운 햄버거로 배를 채우고 하루 종일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내가 왕호랑이이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호랑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갖다 바치는 것\'이라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꿈을 꾸면서 왕호랑이는 오직 사냥꾼의 햄버거에 의지하여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빛나던 이빨은 흔들리고 날카롭던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부드러워져서, 이제 그는 왕호랑이도 아무 것도 아닌 불쌍한 거지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그 호랑이는 자기가 동물원의 철장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조그만 방안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고 매우 안심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어떤 아이가 과자를 주면 그놈은 부끄러운 듯 받아먹었고, 막대기로 쿡쿡 찌르며 놀리면 슬슬 피했으며, 심술궂은 아이들이 그놈의 머리 위에 오줌을 싸도 그저 멀겋게 죽은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그놈은 한때 자신이 태백산 숲 속에 세계적인 명성을 가졌던 왕호랑이라는 사실을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다른 동물들도 그를 존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늙고 불쌍한 노예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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