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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씨발놈들

by Oh.mogilalia 2022. 11. 11.

이문열이 자신의 정치적 보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로 결심한 까닭으로 언급한 것은 '몫과 균형의 문제'였다. 80년대 당시 진보진영의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그것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유행처럼 번져 하나의 시각만이 사회 전체에서 너무 큰 크기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반발했기 때문에 다른 입장의 의견을 내세우는 이들의 존재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문열은 특히 지식인 층에서 이런 쏠림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난 6번의 대선에서 일반 유권자의 지지 형태는 어느 쪽을 여야로 하든 55대 45의 비율 안에서 움직여왔는데, 작가들의 지지 형태는 9대 1 혹은 10대 0으로 보일 만큼 한 정파에 쏠려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왜 진보진영의 허점에 대해서는 신랄하면서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미온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이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이 잘 되지 않은 것들을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집필 논란 때 신문칼럼에 마광수의 작품을 비판하였으며, 마광수 교수가 체포 당시 법원의 결과에 칭찬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책에 관해 적었던 '읽고 난 뒤 내가 먼저 느껴야 했던 것은 구역질이었고, 내뱉고 싶던 것은 욕지기였다'라는 직설적인 발언이 알려진 까닭에 작가에 대해서만 공격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해당 문구의 바로 뒷부분에서 '그런데 그로부터 사흘도 안 돼 두 번째의 구역질과 욕지기가 첫 번째의 그것들을 잊게 했다. 검찰이 이례적으로 시퍼렇게 칼을 빼들고 그 책의 저자와 발행인을 구속했다는 보도였다.'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검찰의 처사 또한 함께 비판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관적으로 노론 음모론을 믿고 있고 노론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조상은 영남 출신의 퇴계학파의 권위자이자 남인이었던 갈암 이현일이었다. 이현일은 숙종의 환국정치의 희생양으로, 역적이라는 억울한 오명까지 쓰면서 정계에서 퇴출당했다. 숙종이 판을 깔아놓은 탓에 집권당인 노론은 이현일을 역적으로 몰아 비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탓에 이현일의 학파나 가문 측에서 노론을 증오하게 된 것이 이문열의 대에까지도 이른 것이다. 이현일이 퇴계학의 권위자라 영남 유생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서인의 학문의 조상인 율곡 이이를 심하게 비판한 까닭에, 조선 말에 들어 이현일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노론 입장에서는 노론대로 여전히 껄끄러운 인물이었으니 오늘날까지도 이현일의 후손들과 막역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는 셈이다.

그의 정치적 견해와 별개로, 논객으로서 역량이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으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2000년대에 여러 논쟁을 촉발시킨 그의 칼럼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문열은 정연하고 엄밀한 논증을 시도하기보다는 과격한 언사를 필두로 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선에서 그치곤 했으며, 그 과정에서 특정한 대상을 홍위병이나 나치당원이 연상된다며 음모론적인 인상비평에 의존하는 모습도 잦았다. 그 탓에 2000년대의 유명한 젖소부인 논쟁에서는 진중권에게 크게 패하는 등 전적이 좋지 않았다.

논쟁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두고 벌어졌다. 이문열은 총선시민연대가 여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관제단체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총선시민연대를 홍위병에 비유하였다.[15] 여기에 진중권은 이문열 자신의 칼럼을 바로 인용하여[16] 총선시민연대와 홍위병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이문열이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는 음모론을 던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논리라면 '에로영화 스타 젖소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다.'라는 진술이 기사에 실려도 된다며 이문열의 발언을 그대로 돌려보낸다.[17]

이 다음에는 소설가 박경범이 이문열을 변호하지만, 그 논리가 영 궁색하다. 총선시민연대의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체제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퉁치고 넘어가는 한편 진중권이 언어폭력을 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중권은 박경범의 견해들 인신공격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첫 번째 논쟁에서 했던 수법대로, 상대의 말을 그대로 차용하여 논리 구조에는 변화 없이 내용만을 변주함으로써 역공을 하는 것이다. 즉 진중권이 이문열을 젖소부인과 관계가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같은 이치에서 이문열이 홍위병을 들먹이는 것 역시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문열이 직접 나오지 않고 대신 다른 사람이 나와 논쟁을 벌인 것 역시 까고 있는데, 이것 역시도 '박경범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문열과 관계가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며 박경범과 이문열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를 붕괴시킨다.

이문열의 논객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특히 추한 흑역사 중 하나가 바로 이 시점에서 등장한다. 공자의 말을 인용해 세태를 비판하는데, 겉으로는 공자의 도가 오늘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진중권과 같은 논객들을 명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정치가 대부에게 있지 않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민들이 정치를 비판하지 않는다",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니 두려워하지 않고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같은 논어 구절을 인용하고, "참으로 세상이 뒤집혀도 어찌 이리 뒤집혔을꼬."와 같은 표현을 써 가면서 시민들이 정치에 왈가왈부하려는 것, 그리고 진중권이 대인에 해당하는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에둘러서 한탄하고 있다.[18] 물론 이와 같은 이문열의 주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중권은 "이 말의 밑바탕에는 정치가 시민들의 것이 아니라는 발상법이 깔려 있다."는 점을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이문열의 말이 이문열 본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다시 지적했다. 즉 이문열이 보기에 권력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현대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문열이라고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인 것이다. 오히려 이문열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같은 시민사회의 일원인 것을 모르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을 한다는 인상을 주는 오만무례한 발언이었다.

위와 같은 세 차례의 논쟁에서 진중권은 이문열의 주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데 성공했고, 반대로 이문열과 박경범은 진중권에게 한 차례도 유의미한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세 번째 논쟁의 경우는 실은 논증이라 할 만한 유의미한 언사도 없어서, 자신이 잔뜩 뿔나 있는 늙은 시대착오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 것 말고 도무지 성과가 없는 말싸움이었다. 이문열은 전문 논설가는 아니었으므로 진중권과의 논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그의 커리어에서 큰 결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때 지식인으로 여겨졌던 이문열이 상당한 논리적 허점을 드러내고,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반복하며 꼰대 같은 언사를 하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때부터 이문열은 본격적으로 우파 논쟁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세 번째 논쟁에서의 이문열의 견해는, 민주주의의 정의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극우적인 견해를 드러낼 것은 어느 정도는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2000년대에 이문열이 드러내는 정치적 의견들은 '시론에 대한 보수적 견해'쯤으로 비교적 온화하게 드러나 있거나 그렇게 인식되고는 하나,[19] 이미 그 근본에서는 한계가 뚜렷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안티조선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문열과 사상적으로 대조되는 위치에 있던 논객 강준만은 이문열이 진중권이라는 임자를 만났다고까지 풍자하였는데, 논쟁의 전개를 살펴보면 강준만의 평가가 매우 솔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2001년에 '홍위병 발언'으로 논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책 장례식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건의 발단은 7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문열은 조선일보에 당시 정부의 언론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내용의 시론을 썼다.# 여기 실린 발언에 대해 추미애 의원이 곡학아세라는 표현을 쓰는 등 해당 시론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를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졌다. 동시에 이문열의 홈페이지에서는 며칠 사이에 3,000여 개의 글이 쇄도하는 등 네티즌의 글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중 '콜리산'이라는 ID를 가진 네티즌은 "당신의 태도에 실망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 20여 권을 반송할 테니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했고 이문열은 "반송해 주시면 책값은 현행법상 최고 이율을 붙여 반환하겠습니다. 아울러 부탁하는 바는 어디 가서 내 책을 읽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다소 감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이와 관련해서 자신에게도 책값을 반환해달라는 요구가 올라오고 책값 반환에 대한 글들이 게시판을 채우는 등 논쟁이 격화되자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감정이 다소 격앙된 상태에서 내 글을 이해 못 하는 특정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값을 반환해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것이 확대 해석된 것"이며 "책값 반환 문제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밝혔다.## 결국 7월 6일 홈페이지는 잠정적으로 폐쇄되기까지 했고, 9일에는 책값 반환 발언에 대한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7월 8일 이문열은 안티조선운동을 벌이는 일부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하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써서 또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항의하는 독자들이 모여 11월 4일 이문열이 살던 부악문원을 찾아가 책을 반환하려 했지만 이문열 측은 이 책들의 인수를 거부하였고, 반환하려던 측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책 장례식'을 치른 뒤 책을 거둬가 고물상에 팔았다. 3달 뒤에는 옥천군에서 이문열의 책들을 풍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문열이 그들의 고향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20][21] 이 인터뷰에서 이문열은 자신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패를 아쉬워했다느니, 한일합방은 합법이라고 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이 와전된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문열은 이 일을 회고하면서 "그 사건 이후 담배를 끊은 이유가 '살아남아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사실 작가의 정치적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부인하고, 또 그런 내용의 퍼포먼스를 그것도 작가가 생활하는 공간 바로 앞에서 벌인다는 건 문화인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이고, 당시 여러 다른 작가들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완전히 정치적 견해가 다른 황석영 작가도 비판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인의 작품들을 태우는 행동은 정치적 견해를 떠나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22] 이 사건으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문열은 얼마 동안 한국을 떠나 있기도 했다. 책 장례식 사건이 있은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홍위병 발언 등을 두고 안티조선 측에서 이문열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신기남의 조상이 친일파 그것도 국가 헌병대 오장이라는 게 드러나자 당시 친일청산 아젠다의 형평성과 신기남을 저격하는 내용인 「겜뻬이 고쬬와 오니 게이부」라는 외부칼럼을 중앙일보에 투고, 김대중 정부 당시의 '홍위병 발언' 필화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칼럼도 많은 구설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전력도 있다. 다만 TV 방송에서 임수경에게 육두문자를 날렸다는 것은 오보로 이문열은 그에 대해서 사과까지 받았다.

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 前 국무총리, 정호용 前 국방장관, 박재완 前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주호영 現 대구 수성구 갑 국회의원, 강재섭 前 한나라당 대표, 심대평 前 충남지사, 윤상현 現 인천 동구·미추홀구 을 국회의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가수 이미자, 국내 최고령 유튜버인 김동길 등이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작한 촛불시위에 대해 12월 2일자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 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라고 언급했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매스컴이 바람 잡아 사람들을 불러 모은 숫자"라 말했다. 그리고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축제)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라며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며 제3자 의견을 에둘러 전했다.

원래 그는 탄핵을 지지했다고 하지만 촛불집회를 보면서 탄핵을 찬성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촛불광장 민심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말하고 정권교체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촛불집회를 과거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당시 촛불집회,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당시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탄핵을 지지한 이유는 헌법 재판소 판결을 겸허히 기다리면 자연히 촛불은 꺼질 줄 알았는데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헌재가 차분하게 판결할 수 없고 촛불이 헌재로 옮기게 되면,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결과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0년대 이후 이문열이 쓴 칼럼들에서는 감정적이고 과격한 언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져, 그가 온건한 보수가 아니라 극우에 가까운 인사가 아닌가 하는 비판의 여지를 생기게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된 조선일보에 올라온 글만 보더라도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 독일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고 쓰는 등 상당히 강한 논조였다.

2018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직을 사임하면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에서 날선 발언을 쏟아냈다. 최근에는 문화계 전반에 퍼진 좌파 일색의 헤게모니에 대해 비판했다.
Q 보수 우파가 헤게모니 장악에 실패한 이유는?
A “이는 뼈저린 반성을 요하는 것이다. 내 짐작으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런 진지전(陣地戰, War of Position)에 관심조차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이는 오히려 자신도 학창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몇 달 감옥 갔다 온 걸 은근히 내세우고 싶어 하는 데마저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껏 어릿한 초등학교 반장이 적어낸 불량학생 명단보다 더 애매한 블랙리스트 같은 걸로 애꿎은 각료들이 감옥이나 들락거리게 했다. ‘민주화’의 탈을 쓴 좌파들이 음험한 진지전을 이미 30년이나 수행해 온 터라 심각하게 대처할 방안을 강구해야 했는데도 두 전직 대통령 모두 너무 소홀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전 대통령에게는 한 번 진지하게 말할 기회가 있었으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고, 박 전 대통령은 아예 만나 본 적조차 없었다. 그렇게 넋 놓고 9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사이 한층 고도화되고 기민해진 저들의 전략에 진지가 다시 탈환당하면서, 뒤이어 밀어닥친 기동전(機動戰, Mobile Warfare)에서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2019년에 들어선 광화문에 나타나 연설을 하기도 하며#, 친이, 비박, 친홍 인사들이 모인 국민통합연대를 만드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2021년 문재인 정부 후반기 이문열을 매섭게 비판했던 강준만, 진중권, 홍세화 등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진보 진영과 시민사회의 위선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자 상당히 흡족해 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세상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진영으로 쪼개진 것 같다.

“아까 안도감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도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하지만 2020년을 넘기면서 생각보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겹치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법원이 살아 있고 진중권·강준만·홍세화도 돌아섰지 않나. 진중권·강준만은 20년 전에 나한테 악쓰고 덤빈 사람들이다.”

-좀 더 설명해달라.

“공자가 남긴 말 중에 ‘사람을 죽여도 되는 다섯 가지 죄’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거짓을 말하면서 달변인 죄’다. 20년 전 홍위병 파문은 진중권과 얽혀 있다. 내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을 보고 ‘홍위병을 돌아보며’라는 칼럼을 쓰자 진중권이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이문열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시민운동에서 홍위병을 떠올리듯이 나도 그를 보면 젖소부인이 생각난다는 내용)라는 글로 반박하며 논객으로 떠올랐다. 강준만은 ‘개가 짖어도 돌아보는데 얼마나 무시하면 대꾸를 안 하냐’고 나를 욕했다.”

-그랬던 그들이 문재인 정부와 갈라섰다.

“어떤 책임감 때문에 앞장섰는데 가다 보니 ‘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 같다. ‘더는 찬성 못 하겠다’며 선 긋기를 한 거다.”

-진중권이나 강준만과의 논쟁은 일부러 피했나.

“검도 6단도 초단과 붙으면 손목 하나 날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겨도 상처받고 지면 끝나는 그런 싸움을 내가 왜 하겠나.”

2022년에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윤석열 후보 지지선언을 하였다.
Q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번 대선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좌파 전체주의적 경향에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은근히 동조해가는 듯한 느낌까지 듭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일은 이번 대선이 정치적 지향 또는 대선 후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는 점입니다. 후보들도 거기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제 남한의 최고 통치권자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모두들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과 시장경제라는 원론적인 지향을 내비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명 후보의 경우에는 ‘경기 동부연합’이라는 아리송한 운동권 계보뿐, 한 번도 정색하고 이념적인 지향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정권 교체, 특히 좌파정권 교체라는 구호를 퍼주기 식의 선심 공약 남발이나 화려한 경제 발전전략 도표와 예상수치의 잔치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Q -진보 성향 문인 가운데 이재명 후보 지지 입장을 밝힌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 보수 진영에서는 아직 그런 분이 없는데요.
"이 자리를 빌려 내가 그걸 드러내려고 합니다. 나는 윤석열 후보가 대학생 시절 모의재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소문을 들은 때부터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 때 국정원 직원 두 사람을 구속시키고 고단한 처지에 빠졌던 것도 생각납니다. 국정원 직원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구속한 검사를 나는 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까지 빚을 졌다고 실토한 조국 일가를 윤 후보가 그렇게 엄격하게 수사한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고, 검찰총장직을 박차고 나올 때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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