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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조민과 조국

by Oh.mogilalia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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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민 minchobae

안녕하세요 쪼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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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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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 조민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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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왼손을 쓰기 시작한 것을 보고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살면서 불편한 일을 많이 겪기는 했다. 팔걸이를 열어 상판을 꺼내어 쓰는 책상은 왜 항상 오른쪽에 있는 걸까? 찻주전자 중 손잡이가 90도인 것은 왜 무조건 오른손잡이용일까? 칼날은 왜 항상 오른쪽으로만 날을 세울까? 그래서 나는 칼로 빵에 잼을 바를 때도 칼등 쪽을 쓰곤 한다. 요즘은 양손잡이, 왼손잡이용 가위도 제법 나오지만 내가 자랄 무렵에는 가위도 항상 오른손잡이용뿐이었다. 식당에 가면 테이블 세팅도 우측에 해준다.
글씨를 쓸 줄 알게 되고부터, 나의 왼손 손날은 늘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가기에 손날이 글씨를 덮으면서 지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왼손잡이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 부모님은 나에게 왼손잡이만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셨다. 혼내지 않고, 왼손잡이는 특별하고 좋은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중략)
내 인생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내 인생의 판단기준으로 삼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남의 것이 된다. 외적인 요소에 내 내면이 휘둘리게 둘 수는 없다. 나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 정말 내려놓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는 ‘정치인 자녀’들은 대개 다음의 세 부류에 속했다.
1. 조용히 숨어 산다.
2. 아예 정치를 한다( 혹은 정치적으로 발언하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3. 변두리에서 사고를 친다.
이 세 부류는 모두 타자화된 자신이다. 세 경우 모두 끊임없이 평생을 ‘누구 딸 누구’ ‘누구 아들 누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이름표로만 남을 뿐이다. 조용히 살면 어떨까? 부모를 빼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조용히 숨어 살아도 정치인의 자녀, 정치를 하면 부모의 후광을 업은 정치인, 사고를 쳐도 사고를 친 정치인 자녀로 정리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셋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다. 사회적으로 너무 알려져서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거나 정치와 연관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조민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숨어있고 싶지 않으니 세상에 나왔다. 나오되, 비정치적이고 싶었다. 비정치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찾아나가는 중이다. (중략)
내가 나 자신을 더 드러내려고 할 때 나로 살 수 있고, 있는 그대로 떳떳하게 살 수 있다. 나만의 무언가를 구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진짜 모습’으로 살아야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산다면, 과연 평생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왼손잡이인 내가 좋다. 내 모습 그대로, ‘조민’으로 오롯이 살기 위해 나는 요즈음 내가 누구이며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매일 찾아나선다.
_「나는 왼손잡이야」중에서


의대 또는 의전원에서는 성적 평균이 좋아도 한 과목만 F를 받으면 유급이 된다. 예컨대, 나는 졸업반이었던 2018년 2학기에 한 과목을 F를 받아서 두 번째 유급을 받았다. 당시 내 성적은 ‘우등’에 해당하는 3.41/4.0이었다. 처음 유급을 받았을 때 나는, 한 과목이 F가 확정되자마자 남은 시험을 전부 보지 않았다. F인 과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한 학기를 다시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며 회자되는 1점대 학점이 나온 것이다.
내가 처음 유급을 받고 학업을 포기하려 했을 때도, 이 친구들은 강하게 말리며 힘내라고 독려해주었다. 언론에서는 유급된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다고 공격했지만, 문제가 된 장학금은 성적우수장학금이 아니었고 지도교수님이 학업을 포기하지 말라고 주신 장학금이었다. 그리고 언론은 내가 이 장학금을 비밀리에 받은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학교 공식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행사에서 내 이름이 호명된 것은 물론이다.
내가 휴학할까 고민했을 때, 나보다 5~6살 적은(대학을 안 나와서 나이 차가 그렇다) 예과 출신 친구들은 말했다.
“누나, 지금 휴학하면 큰일 나요. 그러면 정말 모르는 사람들, 누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애들이랑 같이 다녀야 해. 뉴스로만 누나를 접한 사람들하고 학교 다니면 너무 괴로울 거야.”
“언니, 우리랑 같이 학교 다니고 우리랑 같이 공부해서 나중에 우리랑 같이 졸업해야지 내려가면 안 돼.”
“휴학 절대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나를 걱정하며 말려주었다. 이 한마디 한마디가 다 기억에 남는다. 고민 끝에 나는 휴학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해서 국가고시를 쳤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모의고사를 치는 내내 언론보도는 이어졌고 국가고시를 치는 건물 대문 앞에도 기자가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의사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현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자는 것이 나의 신조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흘린 땀과 노력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친구들과 함께 연습한 덕분에 진급도 하고 국가고시에도 넉넉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친구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
_「선입견을 품고 있던 것은 나였다」중에서


친구들은 정치적인 백그라운드나 편견이 없는 터라 내가 포르쉐를 탄다는 기사가 났을 때 무지하게 웃었다. 나는 열받아 있는데 다들 재미있어하며 낄낄댔다.
“야, 너가 포르쉐 몰면 내 차는 마세라티다!”
“민아, 아반떼가 그렇게 비싼 차였냐?”
그런 면들이 내가 비난의 눈길들을 이겨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아, 이거 심각한 일 아니구나. 진짜가 아니니까 상처받지 말아야지, 하면서. 2019년에 나온 이 허위 보도는 4년 만인 2023년이 되어서야 ‘허위’라고 밝혀졌다. 그런데 법원은 내가 포르쉐를 탄 적이 없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등 가로세로연구소 진행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중략) 내가 포르쉐를 몬다는 기사가 나니 친구들은 모이기만 하면 나를 놀렸다. 기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네, 하고 있으면 “아, 민이가 아반떼를 포르쉐처럼 몰기는 하지. 운전 습관 보고 그랬나 보다” 하면서 깔깔깔 웃는다. 스트레스 상황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니 나도 함께 웃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정치적으 로 중도인 친구가 많다 보니 그게 참 좋았다.
“오늘은 그러면 유명한 민이 포르쉐 타고 밥 먹으러 가자!” 하며 내 파란색 아반떼에 함께 타고 나에게 운전을 시킨다거나, “포르쉐 숨겨놨으면 나부터 태워줘야 해, 알겠지?” 하고 웃는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야 너 이런 기사 났는데 어쩌냐? 큰일 났다” 했으면 같이 불안해졌을 거다. (중략)
이전에는 나도 모르게 소위 ‘특권 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보기에는 순탄하게 의사가 되는 코스를 밟아왔고, 만나온 사람들도 제한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여러 경험을 하고 사회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힘든 일을 겪고 나서 나의 의식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학교와 병원을 벗어난 밖의 세상은 굉장히 넓고도 깊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편안하고 순탄하게 살았을 테지만, 나는 요즈음 내가 몰랐던 ‘밖의 세상’을 경험 것 역시 내 삶을 단단하게 해준 초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모두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_「나의 아반떼와 ‘조민’의 포르쉐」중에서


마음을 열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진짜 나, ‘조민’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친구.
바로 떠오르는 세 명이 있다.
그중 가장 소중했던 한 친구는 이제 별이 되었다.
살면서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모든 걸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친구들은 이제 내 곁에 몇 없다.
지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한 살 후배여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가까워졌다. 이 친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첫 여행을 함께 갈 정도로 친했다. (중략)
이 순간, 이렇게 손 내밀어주고 생일을 챙겨주는 친구……. 누가 내게 또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지수가 나를 데려간 곳은 친구가 일하던 회사에서 임직원 할인이 되는 레스토랑 중 가장 좋은 음식점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라 망설였는데, 지수는 나를 잡아끌었다. 이 음식점은 훗날 뉴스에 나왔다. 한 변호사가 내가 ‘호화 생일파티’를 했다며 제보해 보도한 것이다.
그래, 호화라면 호화였다. 지수와 나 여자 둘이 요리 세 가지에 음료수 한 잔씩을 마셨으니.
그런데 정말 신박한 뉴스가 나왔다.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10명이 먹어서 돈 100만 원 가까이 나왔다면서. 아, 허위 기사라는 게 이렇게 나는구나를 그때 제대로 느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를 진심으로 챙겨준 친구가 곁에 있었으니까. (중략)
그런데 지수는 오지 않았다. 연락도 닿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뉴스에 이태원 참사 소식이 올라왔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자고 있겠지. 사고 당일에도 지수는 미팅과 강좌 수강으로 오후 시간을 다 보냈다고 했고, 지수의 다음 날 일정도 아침부터 밤까지 타이트하게 이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마 피곤해서 집으로 들어갔다가 연락할 타이밍을 놓치고 잠이 들었나 보다’라고만 생각했었다. (중략)
최근, 지수의 어머니가 밥을 사주셨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어머니의 한마디에 마음이 쿵 하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민아, 너 잘 살고 있어.”
인스타그램에 지수 생일 때 지수와 대부도에 가서 찍은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찍어준 나의 소중한 추억, 그것을 내 계정에 올려두고 싶었다. 소중한 기억, 기억하고 싶은 지수를 간접적으로 담은 장면. 그리 생각하고 올린 사진이었다. 누군가는 이 사진을 올린 의도가 무어냐며 내 정신상태까지 언급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그 사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붙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내가 해명한답시고 무언가 언급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면 열수록 기사가 크게 나고, 기사가 크게 나면 지수가 뉴스에 나오겠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지수를 가십거리로 올리는 건 싫었다. 지수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그냥 내가 조금 욕을 먹고 말자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지수의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지수가 찍어준 사진으로 기사가 나서 죄송해요.”
“아니, 아줌마는 민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사진을 올렸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누가 뭐라든 괜찮아. 오히려 지수와의 추억 생각하며 사진 올려줘서 엄마로서 고맙지.”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보면 나를 찍어주는 지수가 보이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사진을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에게도 사랑하는 딸인 지수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사진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 지수의 이야기를 책에 담을지도 정말 고민이 많았다. 혹여나 나로 인해 영향이 미칠지도 모를 지수의 어머니께도 미리 양해를 구했다.
_「슬픔은 조금씩 밀려 들어와」중에서

“민아, 안 되겠다. 너 내 모자 써야겠다.”
아버지와 같이 집 앞에 밥을 먹으러 가려는데 갑자기 나를 보곤 말씀하셨다. 본인이 쓴 모자를 벗어서 내 얼굴을 가릴 정도로 푹 눌러 씌워주셨다.
“갑자기 무슨 모자를 써요.”
“사람들이 너 알아보고 이상한 행동하면 어쩌냐.”
“뭐 어때요.”
내가 인스타그램을 막 시작했을 때, 사진 한 장 남짓 올렸을 무렵이었다. 듬직했던 아버지의 망설이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 ‘아버지가 위축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아버지가 밥 먹으러 나가지 말자고, 안 나가려 하시면 나는 말했다.
“아빠. 이런 때일수록 더 나가야 해요. 사람이 좀 나가서 움직여야 우울증도 안 걸리지. 얼마나 좋아요. 어차피 아빠한테 말 거는 사람들은 있잖아, 아빠를 응원하는 사람이에요. 아빠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작 아빠 만나면 말 안 걸거든.”
아버지의 머릿속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긍정 파워다. 그런데 정말이다. 나의 이런 점이 아버지에게는 힐링 요소가 되는 것 같다. (중략)
내가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살 때, 진짜 내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러다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기로 결정하니 우리 집에도 나에게도 공기가 통하기 시작했다. 회복의 과정이 시작된 거다. 나는 단순히 인스타그램에서 유명 인사가 되고 유튜버로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관심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비난받든 뭘 하든 세상에 당당하게 나설 때 비로소 우리 가족에게 다시금 숨 쉴 틈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도 누군가의 딸이 아닌 한 사람의 성인 그 자체로서 진정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부모님은 정말 선하고 좋은 분들이다. 반면 나는 ‘못된’ 면이 많다. 부모님에 비하면 나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나는 나 위주로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에게 도움이 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생각을 정말 단순하게 한다는 것이고 모든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상황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자 나만의 특장점이다. (중략)
SNS 활동도, 동요 녹음도, 프로필 사진 촬영도, 이렇게 책을 내는 일도 모두 처음 해보는 일들이다. 망설인 적도 있지만 이제는 이런 새로운 작업 자체에 도전할 기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기쁘다.
꼬아서 숨기고, 포장하는 것보다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보다 진실되지 않을까? 세상에 나와도 괜찮다. 나와보니까 알겠다. 세상 밖으로 나와서 보아야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도 천천히 서툴지만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시콜콜, 복작복작하게 새로이 도전하며 내 안의 꽃이 움틀 날을 기다린다.
_「새로운 도전, 내 길을 찾아서」중에서


아버지가 장관 후보로 지명된 후 온갖 일이 벌어졌던 만 사 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깨달은 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꿋꿋하게 해나가야 한다는 것, 잠시 흔들릴 때가 있더라도 자신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깨달음은 내가 후회 없이 선택하고 가급적 후회가 적게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원칙이 되어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꿋꿋하게 하는 것’, 참 중요한 일이다. 다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의사 국가고시를 쳤고, 인턴을 했고, 레지던트도 지원해보았고, 과장으로 일하고, 부원장으로도 일했다. 얼굴을 드러낸 SNS와 유튜브를 개설해야겠다고 결심하여 그 세계의 문을 열었고, 오로지 나의 결정으로 재판을 취하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숨어있을 것을 강요하며 충고했다. 자꾸만-아버지조차도- 가능하면 당분간은 내 얼굴을 노출하지 말고 이름도 드러나지 않게 살라고 했다. 구설에 오르지 않게 조심하고 말도 삼가란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를 믿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독단적으로,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다. 여러 의견을 듣되, 최종 결정권자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말에 휘둘리거나,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기에 맞겠지’ 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논리적으로 납득하고 그것이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했을 때 나의 결정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의사로 일하기 전에 의사로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쉬기만 하라고 했으면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견을 내 마음에 담아뒀다가, 의사로 충분히 일해보고, 내가 의사 면허를 붙들고 있는 것이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본 다음 비로소 내려놓아야겠다는 마음이 진정으로 들었을 때 내려놓는다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내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 언제 할지,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 과정에서 나는 후회가 없...

저는 조민이며,
제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도 조민의 삶입니다

“인생에 레몬이 주어지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격언이 있다. 그녀만의 레시피로 인생에서 만난 ‘신 레몬’으로 만든 ‘레모네이드’는 어떤 맛일까? 세상과 소통하고자 풀어낸 그녀만의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에 담았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 그리고 나의 길을 찾는 것은 누구에게나 평생에 걸쳐 모색해야 할 숙제다. 이 책은 인문서도 아니고 심오한 고찰이나 분석을 담은 것이 아니다. 저자의 연대기 혹은 자서전도 아니다.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문제를 ‘나’로부터 찾기 시작했다. 기억, 삶의 궤적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짚으며 미래를 도약해본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저자는 ‘나’와 마주하며 진실된 자신을 바라보고 가치관과 삶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
세상의 오해를 풀고자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사람,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 조민’인 사람에 대해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잠시나마 독자들을 미소 짓게 하고 때론 끄덕이게 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이런 때일수록 상식적으로 살고자 한다. 기소가 된다면 재판을 받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지겠다고.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족한 점을 성찰하면서 앞으로 더 바르게, 더 열심히 살겠다고.

디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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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화살이 꽂힌 채 길 없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
법대 교수, 법무부장관에서 자연인으로 돌아온 조국의 첫 에세이
2023년 6월 12일 법학자 조국은 서울대로부터 교수직을 파면당했다. 이 책은 법대 교수 조국이 법을 공부한 이유와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의 참된 의미에 대해 기록한 책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이후, 이제는 교수도 아니고 장관도 아닌 자연인으로서 지난 10년의 폭풍 같았던 시간을 통과하며 온몸으로 부닥친 투쟁을 집약한 책이다. 형사법 전공자인 저자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법과 법치주의에는 오직 혹형만 강조되고 있을 뿐 ‘연민’과 ‘정의’가 빠져 있다고 역설한다. 책 제목의 ‘눈물’은 폭압적인 법권력에 의해 신음하며 흘리는 ‘분노의 눈물’과, 그러한 압력에 맞서면서도 주변의 아픔을 살피며 ‘연민의 눈물’을 동시에 흘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뜻한다. 정의의 여신으로 알려진 디케(Dike)는 두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저울을, 나머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 2023년 대한민국에서 작동하는 법치의 논리는 피가 묻은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망나니를 닮아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제라도 법의 진짜 모습을 되찾기 위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담하게 서술했다.

“지금, 법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800원’ 대 ‘85만 원’… 똑같은 법, 전혀 다른 판결

2011년,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박 모 씨가 하루아침에 해고된다. 그의 해고 사유는 어느 날 승객에게 받은 요금 중 잔돈 400원을 사용해 두 차례에 걸쳐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었다는 것이었다. 박 씨는 즉각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사측의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후 그는 재취업을 포기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3년 뒤, 상대 변호사로부터 85만 원 어치의 술접대를 받은 어느 한 검사가 낸 ‘면직 취소 소송’ 재판이 열렸다. “향응의 가액이 85만 원 정도에 불과하고, 위법·부당한 행위를 했는지 자료가 없다. 따라서 파면은 가혹하다.” 이 판결문을 작성한 판사는 앞서 버스 기사의 해고 사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판사였다. ‘800원’ 대 ‘85만 원’. 두 재판의 담당 판사는 동일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법대로 내려졌다는 이 판결이 진정 정의로운 것일까?

왜곡된 법 해석과 법 집행을 통해 치밀하게 설계·구축되고 있는 ‘검찰공화국’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담긴 이 책의 1장에서 저자는, 새 정부 집권 후 지난 1년간 한국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망가지고 왜곡되었는지를 법의 시각으로 낱낱이 분석한다. 자신의 사지에 오랏줄을 채워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신검부’ 권력의 역사를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경험한 저자는 이 거대한 괴물의 탄생기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저자는 시곗바늘을 더 뒤로 돌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이 문재인 정부 하 검찰개혁에 맞서 개혁의 본질을 왜곡하고, 급기야 정권 교체의 선봉장이 되어 수구보수 세력을 통합해 이 땅에 ‘대한검국(大韓檢國)’을 세우기까지의 그 기원을 추적한다.

“지금 시민들은 누구를 가장 두려워하는가?”
법학자의 언어로 정리한 ‘검찰공화국’ 괴물의 연대기

현 정부는 집권 후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법무부장관은 물론, 3만 명 경찰 수사권을 통솔하는 국가수사본부장, 고위공직자 후보의 세평을 수집하는 국정원 기조실장 등에 이르기까지 정부 핵심 요직의 절대다수를 검찰 출신으로 기용했다. 이것만으로 부족해, 고위공직자 후보의 인사를 검증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기존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그 기능을 법무부(인사정보관리단)에 이관함으로써 앞으로 반대 세력의 견제 가능성마저 제거했다. 그리고 이제는 수사권·기소권·영장청구권 등 무소불위의 ‘검찰권’을 통해 대한검국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만약 기소를 당해 법정에서 법률적으로 매우 숙련된 검사를 만나 몇 년간 재판을 받는다면, 결국 대법원에 가서 무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인생이 절단난다. 판사가 마지막에 무죄를 고해서 여러분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평생 법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형사법에 엄청나게 숙련된 검사와 법정에서 마주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다. 이처럼 검찰의 기소라는 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_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2021년 11월 25일)

대체 과거에 비해 검찰권이 얼마나 강화된 것인지, 검찰 출신 관료들이 어떻게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나라에서 법을 모른 채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 온 보통의 시민이 어떻게 ‘법의 이름’으로 인생이 절단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조마조마했던 사람이라면, 온 가족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사냥식 수사를 통해 멸문지화를 당한 전 법무부장관 조국의 회고를 통해 검찰권이 최고의 무력(武力)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군부의 총칼이 최고의 무력이었던 군사독재 시절처럼 말이다. 저자는 법의 용어와 복잡한 사실관계가 부담스러울 독자들을 위해, 새 정부 집권 후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린 지난 1년의 시간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장면을 법학자의 시각으로 직접 도해화해 책 안에 첨부함으로써 대한민국 법의 현주소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왔다.

“권력, 돈, 선입견,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 정의의 여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럼에도 조국이 여전히 법의 존재 이유를 믿는 이유

일제 법기술자들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지 78년이 흐른 지금, 민주화가 꽃피어 87년 체제가 시작된 지 36년이 흐른 지금, 정치·사회의 온갖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고자 한 촛불혁명이 일어난 지 7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법의 현실이 이토록 야만적이고 기만적이라는 사실은 충격과 분노를 넘어 비통과 허무에 이른다. 하지만 저자는 ‘더 베이고 더 찔리고 더 멍들더라도’ 계속해서 ‘길 없는 길’을 걷겠다고 말한다.

“현실은 험난하지만, 여전히 나는 법의 역할을 믿으려 한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망나니처럼 무지막지하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아니라, 늘 균형과 형평을 중시하는 차분한 모습이다. 나는 디케가 형벌권으로 굴종과 복종을 요구하는 신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하는 신이라고 믿는다. 또한 머지않은 시간에 주권자 시민들이 ‘법치(法治)’가 ‘검치(檢治)’가 아님을 확실히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궁극에는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닌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시간이 오리라 믿는다.” _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청와대민정수석 재직 시 당정청을 설득해 더 철저한 검찰개혁을 추진하여 검찰공화국의 출현을 막지 못했던 자신의 과오에 대해 “모두 나의 가장 중대한 잘못 탓입니다”라는 가톨릭 고백 기도 문구를 빌려 담담히 고백한다. “누가 나를 위해 ‘꽃길’을 깔아줄 리 없고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이제 내 앞에 멋지고 우아한 길은 없다. 자갈밭과 진흙탕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한다.” 그가 지적하는 오늘날 왜곡된 대한민국 법치의 문제점, 그리고 저자의 자기반성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모두 독자의 몫이다. 살아 있는 심장이 가시덤불에 구르는듯한 고통을 겪었을 저자의 진심을,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법의 역할을 믿는 이유를 이 책 「디케의 눈물」을 통해 확인해보기 바란다.

쓰레기 굥돼지 정권 탄핵의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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