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비몽사몽 간의 화두 '수태고지'
잠 속이었는지, 의식이 있는 상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늘 깊이 잠들지 못하니까. 눈뜨자마자 의식에 남은 화두는 '수태고지'
곧장 태블릿을 들고 '수태고지'를 검색. 나무위키 내용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 옹의 수태고지 그림 설명이 아래와 같다.
<그림 해설> 1472~1475년경에 완성된 유화로, 크기는 98 x 217 cm 이며,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기작이다. 마리아의 팔 부분이 좀 기이하게 되어있는데 3D복원을 하면 뒤틀려 있는 것으로 나온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다빈치의 스케치 연습 노트에 기반한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이 그림이 걸려 있던 위치 때문이라는 거다. 원래 이 그림은 큰 성당의 오른쪽, 앞쪽 벽에 높이 걸려 있었다는 거다. 아무도 그 그림을 정면에서 볼 수 없었다. 앞쪽에는 제단이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들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밑에서 올려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빈치는 그림을 도대체 누가 어디서 보는가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참조
아래 글은 다빈치 옹의 수태고지 그림 해설 끝에 링크된 중앙일보에 기고한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7346593 글 중 일부이다.
객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인 원근법
원근법의 발견은 ‘주체’의 발견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 즉 주관성의 발견이라는 이야기다. 객관성·합리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원근법이 주체의 발견이라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서로 모순관계인 객관성과 주관성이 동시에 성립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 개의 축이 생기려면 반드시 다른 쪽의 축이 생겨야 한다.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성립과정을 서양철학에서는 ‘변증법’으로 설명하고,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의 원리’로 설명한다.
‘퍼스펙티브(perspective)’란 영어단어의 한자어 번역은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절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객관적 시점을 이야기할 때는 ‘원근법(perspective)’으로 번역되고, 주관적 시점을 이야기할 때는 ‘관점(perspective)’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 관점의 문제가 서양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의 ‘싱글 퍼스텍티브(single perspective)’와 동양의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 사이에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르네상스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그 논의의 범위를 확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객관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로 서로 약속하는 지점에 불과하다. ‘객관성’이란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대치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어느 때보다도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본질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의 상호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우길 경우가 아주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봐야 된다. 원근법 회화에서 ‘소실점’의 위치를 화가가 자기 마음대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찰자들은 그 소실점으로 자신의 관점을 회귀시켜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화가라는 ‘그림 생산자’의 초월적 지위를 이용해 소실점의 위치를 그곳이라고 우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그림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똑같이 보인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7346593
참말로 대단한 다빈치 옹이시다.
막둥이들이 인문학 관련 책을 많이 읽있으면 하는 바람도...
여하튼 나도 새삼스레 또하나의 진리(?)를 깨친 듯하다. ㅎㅎ~